[전병두 목사 칼럼 ] 교회 설립 25주년, 목양 50주년 감사
- 작성자 : HesedKosin
- 18-12-04 11:26
글 한편 올립니다. 졸고를 읽어 주시고 많은 격려로 용기를 북돋우어 주신 선배님, 동역자 여러분께 고마움의 마음도 함께 전합니다. 시간 나시는 대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회 설립 25주년, 목양 50주년 감사
전병두 목사
오레곤 주 유진 중앙 교회 담임 목사
2019년도는 또 하나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게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유진 중앙교회 설립 25주년이 되는 해이고 개인적으로는 목회 생활 50주년이 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유진 중앙교회는 교민 전도와 오레곤 주립 대학을 찾아 온 유학생 전도를 목적으로 출발했습니다. 교회 설립을 위하여 시카고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막 안수를 받은 이유식 목사님을 초청하였습니다. 당시에 유진에는 한국의 현대 전자에서 현지 법인 하이닉스 반도체 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2 만여명 가까운 재학생을 두고 있는 주립대학교 다음으로 하이닉스 회사는 일천 여명의 사원을 고용하는 대규모 회사를 목표했습니다. 당시 유진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였습니다. 한국에서 끊임없이 회사 관계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교회를 창립하고 성장의 꿈을 키워나가던 이 목사님은 그 이듬해 봄에 보다 넓은 엘에이로 이사를 떠났습니다. 그 뒤를 이어 부름을 받고 제가 찾아 온 것은 1995년 6월 말이었습니다.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구름 한점 없는 여름 하늘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미국의 첫 기착지인 이곳 유진에서 제 자신의 일생 목회 생활의 절반인 25년을 사역해 왔다는 사실이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유진에서의 삶은 앞만 보고 달려왔던 사반세기 목회 여정이었습니다. 미국 교단인 커버난트 복음교회(Evangelical Covenant Church)의 초청을 받고 유진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스위스에서 유학 생활을 마감할 때였습니다.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딛기 위하여 비행기에 탑승하였을 때의 감정은 한국에서 첫 목회지를 향해 찾아 가던 때의 생각과 너무나도 흡사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목회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은 곳은 상주군에 위치한 시골 교회였는 데 대나무 바위라는 의미를 지닌 죽암교회였습니다. 목회자를 청할 수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의 교회인데다 마땅한 사역자를 한동안 구하지 못했던 터라 아직 신학도 공부하지 못하고 대구에서 성경을 배우고 있던 저를 전도사로 초청했습니다. 첫 설교를 부탁받은 날은 1968년 7월의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김천을 경유하여 상주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날 저녁 설교를 위하여 눈을 감고 열심히 설교 원고를 외웠습니다. 그날의 주제인 창세기 노아 홍수 본문은 완전히 암기하였습니다. 설교 내용을 세 대지로 나누어 노아 시대의 타락상과 노아의 전도, 그리고 백성들의 무관심을 상기시키고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두 번 쯤은 음성의 톤도 고조시키고 강댓상도 힘차게 내려쳐서 교인들이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야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기차가 상주 역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교회가 있는 마을이 가까운 곳에서 내렸습니다. 그곳에서 마을까지는 약 시오리 쯤 되었는 데 도보로 갔습니다. 마을 앞에는 낙동강이 가로 막혀 있어서 한참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 저편에서 나룻배 한척이 유유히 배를 저어 젊은 전도사의 도강을 도왔습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니 사공은 힐금 힐금 쳐다보면서도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예배당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직 밝은 오후였습니다. 교회당의 규모는 조그만 초가 삼칸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볏짚으로 지붕이 덮여 있었고 흙벽돌로 거칠게 쌓아 올린 벽은 80도 정도로 기울여져 있어서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습니다. 소낙비라도 많이 쏟아져 내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서니 마루 바닥 맨 앞쪽에는 강댓상이 놓여 있었고 마루 중간 쯤 사람 키만큼의 높이에 석유 등이 하나 매달려 있었습니다. 적막함 만이 공간을 가득 메울 뿐이었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이곳에서 예배드리며 희노애락을 겪을 곳이라 생각하니 오랫동안 살아온 정감어린 고향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인들은 참 착하고 순박했습니다. 일년 쯤 지났을 때 몇 명 안되는 교인들이지만 공동의회를 소집하고 교회당 건축을 의논했습니다. 모두들 찬성해 주는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해 가을 농사를 지은 곡식으로 연보를 하여 동네 앞 목이 좋은 땅을 구입하고 교회당 건축 준비를 했습니다. 낮에는 들에서 일한 교인들이 저녁이 되면 모여 마을 앞 강변 모래를 부지런히 교회를 지을 터로 퍼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도 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얹는 것처럼 모래를 대야에 담아 머리에 얹어 나르고 남자들은 지게로, 리하카로 밤이 깊도록 날랐습니다. 동민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앞에 예배당을 지으면 마을 수호신이 들어오지 못해서 마을이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단오절이 다가 왔습니다. 동민들은 잔뜩 술이 취한 청년들을 앞세워 교회로 쳐들어왔습니다. 전도사를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사택 방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왁자지껄 기세 등등한 소리는 점점 가까워 오고 저의 기도는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었습니다. "전도사 이리로 나와!" 마침내 누군가 방문을 확 열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쑥 들어 밀었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아, 그놈 여기 없네? 어디론가 도망갔어!" 문을 쾅 닫고 사람들은 사립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해 가을에 예쁘고 아담한 시멘트 벽돌로 교회당을 완공했습니다. 첫 사역지에서 주님은 목회 초역에 나선 어설픈 젊은 전도사를 강하게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그 경험은 지난 50년간의 목회 생활을 더욱 단단하게 받쳐주는 밑바탕이 되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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