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두목사 칼럼]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작성자 : HesedKosin
- 20-10-25 04:47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세계 속의 한국 교회들 – 스위스)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 스위스는 종교 개혁을 통하여 세계 개신교회의 산파 역할을 하였습니다. 16세기 독일에서는 루터가 개혁의 횃불을 밝혀 중세 암흑 시대의 등불이 되었다면 스위스에서는 칼빈과 쯔빙글리, 베자와 같은 개혁의 선각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개혁 사상은 곧 북유럽으로 확산되어 네델란드와 스웨덴, 핀란드로 전파되어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신학을 가르쳤던 칼빈의 사상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에게 로마 케토릭 교회 교권 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나 하나님 영광을 중심한 개혁 신학으로 무장하게 하였습니다. 스코들란드로 돌아간 제네바의 젊은 신학도들은 민들레 꽃잎이 사방으로 흩어져 새 생명을 심듯이 청교도의 신앙을 훗날 미국에 뿌리 내리게 하였습니다.
스위스는 인구 850 만 명의 작은 나라이지만 유엔 각종 국제 기구가 모여있는 제네바, 금융의 도시 취리히, 산도스와 같은 굴지의 화학 회사가 있는 바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진 수도 베른 등을 중심으로 유럽의 중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님들 중에 장로교 출신들은 개혁 신학으로 훈련되고 무장된 선교사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평양에 세워진 “평양신학교”는 마삼열(Samuel A.Maffett) 선교사님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는 미국 인디아나 주의 매디슨에서 태어나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르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26세 때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그가 세운 평양신학교에서 최초로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양진백 목사님들이 최초 한국 장로교 목사님들이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 보면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신앙으로 그슬려 올라갑니다. 제네바의 칼빈에게서 신학 훈련을 받은 열정적인 청년들에 의해서 개혁 주의 신학은 오늘 날 세계 개혁주의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세계 171개국에 2만8천명의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필리핀, 태국 등의 아시아 국가는 물론이고 미국, 유럽의 여러 나라 들에서도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랑스러운 대한의 복음 사역자들입니다.
스위스의 대 도시에도 한국 교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교회들은 일차적으로 한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전도 사역을 펼치고 있지만 국제 결혼 등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는 현지 인들과 친분을 맺은 친구들이나 그 이웃 분 들까지 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역의 교회 들 마다 신실한 교포들을 세우셔서 복음 사역에 수종들게 하셨습니다. 제네바 한인 교회는 한국에서 입양되어 성장한 분들, 국제기구에 파견된 한국인 성도들, 현지에 정착한 교포 등 다양한 분들이 주축이 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김종철집사님은 어린 나이에 스위스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한 신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취리히에는 세 개의 한인 교회들이 세워져 있는 데 교인들의 구성은 취리히에 파견된 한국의 증권사 직원들과 그 가족, 대한 항공 직원과 그 가족,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및 취리히 주립대학교 유학생들과 현지에 취업하여 정착한 한국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젤에도 한인 교회가 세워져 있고 몇 가족들이 매 주일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리며 한국에서 도착하는 유학생들을 보살피며 출장차 방문하는 한국 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송리산 집사님 내외분은 독일에서 이주해 온 가정인데 두 아들을 기르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송집사님은 제1차 파독 광부 출신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땅한 취업을 하지 못한 채 고향인 영주에 머물고 있었는 데 파독 광부 모집 광고를 보고 취업 원서를 내었던 때를 회상하곤 했습니다. 지하 일 천미터가 더 되는 땅 속에서 땀과 석탄가루가 온 몸을 검게 감싸도록 일하던 동료 중에는 일이 너무 힘들어 하루는 새벽부터 진한 원두 커피를 열잔 정도 마신 후 있는 힘을 다하여 집 주위를 몇 바퀴 뛴 후 병원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간호사가 열을 재어 보니 40도가 웃돌고 맥박은 너무 빨랐습니다. 의사는 당장 입원을 시키고 몇일 간 휴식을 취하도록 한 일화도 전하곤 했습니다. 송 집사님은 어느 휴일 날 공원에 놀러 갔다가 지금의 부인을 만나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는 데, 당시 그의 부인은 파독 간호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주일이면 한인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며 향수를 달래곤 했습니다.
지금은 스위스로 이주해 와서 두 아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취리히 한인 교회는 스위스에 한국 알리는 일에도 적극적입니다. 매년 취리히 축제 행사 때 한국을 대표하여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거리를 행진할 때 많은 박수를 받곤 하였습니다. 특히 취리히 시민 초청 음악회 활동을 통하여 아름다운 우리의 가곡과 성가곡을 합창했을 때 취리히 신문은 “아시아에서 온 한국 교회가 취리히에서 서양 음악을 선보이다”라는 제목으로 칭찬과 격려의 기사를 실어 주었습니다.
500 여년 전에 스위스에서 시작된 개혁 신앙의 운동이 극동의 작은 한 나라 대한 민국에서 열매를 맺고 다시 스위스를 찾아와 꽃을 피우게 하신 주님의 놀라운 역사에 놀라울 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구절이 더욱 실감났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0장15절)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