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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전병두목사 칼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미국을 상징하는 워싱턴 기념탑 앞 잔디밭에 2 만개의 작은 성조기가 열을 지어 꾲혔습니다. 코비드 19(Covid-19)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은 자들을 추모하여 코비드 희생자 기념 단체들이 기획한 이 행사는 희생자의 가족 뿐 아니라 미국민들의 가슴을 숙연하게 하였습니다. 졸지에 어머니와 누이 동생을 이 병으로 잃어 버린 한 백인 청년이 성조깃발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인지는 누구도 알수 없는 요즈음입니다.  잔디 밭 위의 수 많은 성조기 만큼이나 많은 불안감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을 위협하고 있는 이 재앙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유사한 재앙이 이미 중세 유럽을 강타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을 강타하였던 흑사병이 그것입니다. 이 병에 감염되었던 많은 사람 중에 쯔빙글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알프스 산맥이 그림처럼 둘러 싼 조그만 마을, 빌트하우스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5세 때에 베른대학교에서 고전과 음악 등을 공부하였고 20세가 되던 해 바젤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같은 해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 후 첫 사역지 글라루스에서 십년 동안 교구민들을 보살폈습니다.

그가 후에 취리히 성당에 부임한 때는 1518년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스위스에도 들이닥쳤습니다. 그 해 8월에 쯔빙글리는 흑사병에 감몀되어 죽음의 고비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2년동안 사투를 벌리면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 뿐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서원의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죽음의 질병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면 평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빼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를 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다지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전염병은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크나큰 사건이었습니다. 십년 동안 사제로서 활동해 왔던 그에게 온갖 화려한 예배 형식과 전통적인 의식도 그에게 별로 의미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로마 케토릭 교회가 유럽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마 교회가 중시하는 미사 중심의 예배에 대한 회의가 그를 사로잡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로마 교권을 지키기 위하여 유럽의 젊은 이들이 용병으로 소집되어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 하는 것도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독일에서는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쯔빙글리와 루터가 개인적인 교제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참된 신앙이란 성경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사상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개혁자들은 성만찬의 견해 차이로 끝까지 함께 가지는 못하였지만 모든 신학적인 교리나 해석은 성경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습니다.

 쯔빙글리는 자신이 사역하고 있던 취리히의 대성당(Gross Muenster) 안에 세워져 있던 성모 상, 성자 상들을 모조리 철거하여 넓은 광장에서 시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 데 불태웠습니다. 오늘 날 취리히의 대 성당안을 들어가 보면 로마 케토릭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성화나 마리아 상, 성자 상등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전통적으로 섬겨 오던 대로 성자숭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로마 케토릭 교회와 공개 토론과 변론을 할 때 그가 사용한 강력한 무기는 성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학 사상에 대한 반론과 공격도 강력하였습니다. 특히 알프스 산 계곡 깊이에 위치한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 루체른(Luzern), 추크(Zug), 프리부르그(Fribourg) 주 등은 동맹을 결성하여 취리히를 공격해 왔습니다. 이에 맞서 쯔빙글리의 개혁 사상에 동조한 주들은 베른, 바젤등이었습니다. 이들 주들과 힘을 합하여 맞서 싸웠습니다. 로마 케토릭 동맹 군은 7천명의 동맹군을 이끌고 쯔빙글리의 개혁 군대를 공격해 왔습니다. 이 카펠 전투에서 쯔빙글리의 군인은 2천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쯔빙글리의 군 500 여명이 전사하였고 당시 47세였던 쯔빙글리도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1531년 10월 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던대로 성경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습니다. 흑사 병에 감염되어 죽음의 문 턱에서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가 굳게 믿은 성경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였습니다.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흑사 병은 쯔빙글리에게는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인문학에 깊이 영향을 받아 성경도 하나의 문학 작품 정도로 인식되어 왔던 한 무명의 사제에게 대 각성을 일으키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을 위협하였던 전염병이었습니다. 오늘 날 스위스가 종교 개혁의 나라로 굳게 서게 된 역사적인 배경은 스위스 서남부 제네바의 칼빈과 함께 북부 지역에서 강력한 활동을 펼친 쯔빙글리의 영향 때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나타내어 스위스에 위대한 개혁 신앙의 깃발을 힘차게 펄럭이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이 재앙 중에서도 주님은 분명히 역사하시고 계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다윗의 시 한 구절이 떠 오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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