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도 목사 칼럼] ‘딸과 손자에게 들려줄 이야기’
- 작성자 : HesedKosin
- 20-05-27 02:33
‘딸과 손자에게 들려줄 이야기’
이응도 목사 (초대교회, 동부)
지난 주간에 10살 된 딸 승하와 낚시를 갔습니다. 딸과의 데이트,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당연히 물고기를
제대로 잡지는 못했구요, 대신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중에 저의 마음에 깊이 들어온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소개합니다.
“승하야, 이번에 말이야... 바이러스 때문에 학교에 안가고 집에만 있잖아.... 좋은 건 뭐고, 안좋은 건 뭐야?
우리 하나씩 이야기해볼까?”
하나씩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대부분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학교에는 안가서 좋지만
친구들은 보고 싶고, 가족들과 다 함께 있어서 좋지만 밖에도 나가고 싶고.... 한참을 이야기를 하다가 승하가 문득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빠, 나는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면.... 내 딸하고 손자들한테 말해 줄거야. 내가 열 살 때 코로나 바이러
스가 퍼졌는데.... 사람들이 다 집에 있고, 겁내고 무서워하는데....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했다가 다
말해 줄 거야....”
아주 평범한 말이었는데 저는 잠시 생각을 멈췄습니다. 그렇지.... 나의 아버지 세대는 6.25 전쟁을 늘 말했었지.
보릿고개가 있다고 했었지.... 그래서 열심히 일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전쟁과 보릿고개는 그 시대를 경험했던
세대의 사상이 되고 이념이 되고 기준이 되었습니다. 저희 세대, 소위 386세대의 기억에는 80년 광주 항쟁과 87년
민주화 항쟁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세대가 오늘의 정치와 경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한국은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제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저의 자녀들의 세대의
기억 속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만난 역사적 과제가 있고 통과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 살았고, 우리
자신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나는 무엇을 했던가? 어떤 삶을 선택했던가? 그런 시절
을 보냈으므로 나는 나의 자녀에게, 후손에게 어떤 기억과 가치와 이야기를 남겨줄 것인가? 인류의 역사를 보면 한 세대
가 한 시대를 살고 그 경험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교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어서 다음 세대가 살아야 할 길을
닦아 왔습니다. 거창하게 인류를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 개인의 삶에도 그렇습니다. 인생마다 고비가 있고, 시련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하고 성장시킵니다. 내 삶의 나이테가 자라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하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가...? 나는 나의 자녀에게, 나의 후손에게 어떤 이야기로 그들이 살아야 할 삶의 길을 보여줄
것인가...? 어이없게도 이제 열 살 먹은 딸이 자신의 자녀와 손주들에게 들려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는 2020년, 인류가 새롭게 경험하는 Pandemic의 상황 속에서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가? 내 자녀와
후손이 삶으로 걸어야 할 길을 제대로 만들고 있는가....?
알베르토 까뮈의 ‘페스트’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이었던 리유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고통의 터널을 지나왔는지를 까먹을 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그 지독한 불행을 겪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이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
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을 수 있고,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한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쥐들을 흔들어 깨우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을 것이다.”
우리 시대가 만난 COVID19의 시대를 지나면서 좋은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국가와 사회가 그렇게
해야 하고,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그러합니다. 이 어려운 시대를 어떻게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었던가.... 그저 살아
남기 위해 숨고 은둔하는 선택이 아니라, 인류가 공통으로 만난 시련을 공동체적인 지혜와 협력으로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떤 실천을 했는지 이야기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음 세대가 더 어려운 시련들을 만날 것인데.... 우리 시대가 만든
이야기들이 그들이 걸어갈 길이 되고, 그들이 열어젖힐 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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