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영 목사 / 나눔교회
- 작성자 : 고신관리자
- 12-06-30 17:22
목회란 영적 파이프 라인을 뚫는 것입니다
24년간 평신도 선교사로 살았던 삶을 정리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안지영 목사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평신도 선교사로 있다가 왜 목사가 되었느냐?”
평신도 선교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80년대 초, 선교사로 떠나는 그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목사가 아니라도 선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교회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선교사역을 마감할 때까지 신학을 하지 않았던 안 선교사는 선교사역의 반을 넘어설 무렵,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혀있는 영적 파이프 라인을 뚫어주는 일이 목회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목회현장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매달릴 때, 그의 영혼 또한 생명력을 얻고 있었다고 전한다.
전세계에 수많은 언어들이 있지만, 그 언어들 가운데도 성경이 없는 부족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자연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성경번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80년, 대학에 복학한 4학년 때 광주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현실을 보며 ‘한국에서는 소망이 없다’는 생각에 유학을 준비하였습니다. 같은 해, 8월 여의도에서는 복음화대성회가 열려 200만의 크리스천들이 모였고 80만의 군중들이 비를 맞으며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선교강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비를 맞으며 기도한다는 소식에 눈물이 나면서, 제가 마치 하늘 위에서 여의도 광장을 내려다 보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주님은 얼마나 아프실까?”, “내가 이 민족을 사랑하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유학이 아니라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오후 강의 시간에 Ralph Winter 박사는 “이 시대에 여러분 중에서 민족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선교지로 가라”라는 도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날 밤 모든 강의가 끝나고 혼자 강의실에 남아 기도하기를 “선교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말씀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룹성경공부 시간에 말씀을 듣던 중, 하나님의 Calling을 확인했습니다. 선교사 훈련을 위해 미국으로 가기로 했는데 비자문제가 그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러 가는데 하나님이 직접 도와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세번째로 부르심을 확인시켜 주셨고, 저는 미국의 위클리프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위클리프에서의 3년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며 “선교사로 나가는 것과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하고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3년의 미국생활 속에서 이민교회의 문제들을 보게 하셨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미래는 교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한국의 선교단체에서 잠시 일하는 동안 말씀과 삶이 분리된 수많은 목회자들을 만나며 마음의 부담, 불편함이 왔습니다. 목회자보다는 여러곳을 다니며 말씀을 전할 기회가 많아, 틈만 나면 메시지에 말씀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1986년 12월 파푸아 뉴기니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선교사 훈련을 마친지 2년만에 드디어 선교지의 땅을 밟은 것입니다.
“드디어 내가 여기에 왔구나”하는 감격과 “하나님, 이 땅에 제가 왔습니다”라는 감사를 드리기도 전에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내가 생각했던 나라가 아니구나”하는 것을 숨막히는 열기와 함께 느끼게 되었죠.
쥐벼룩에 온 몸을 물리며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소형 비행기로 위클리프 선교본부로 이동하였습니다. 어렵게 도착한 선교본부에서의 생활은 처음 겪어보는 지진과 다친 허리의 재발로 인한 통증, 큰 아이의 폐렴, 작은 아이의 한 달이상 계속되는 설사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하나님을 원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시편 1장 6절의 말씀으로 저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셨습니다.
흔히 우리는 ‘형통의 삶’에 대해 착각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 진정한 형통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고,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와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위클리프를 만나 성경번역의 사역을 하였으나 성경번역이 목적이 아니라 번역은 도구일 뿐, ‘제자 삼으라’는 목적아래 부족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또 다른 제자를 만드는 것이 저의 사역이었습니다.
1986~2002년까지 파푸아뉴기니의 성경번역 선교사로 사역하며 과하티케 부족어로 신약성경을 봉헌하였습니다. 당시 어느 부족은 복음을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로 만들어진 성경의 영화 상영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인지 모른 채 영화를 보러 와서는 마치 물을 꿀꺽꿀꺽 마시듯 영화 내용을 시원하게 이해하며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마을의 한 형제가 영화속의 성경 말씀을 전하였을 때, 그들은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또 마을 지도자의 아들이 병이 들어 온갖 굿을 다 하였으나 병이 낫지 않아 고생할 때, 그의 아버지가 와서 기도를 받고 집에 돌아가 보니 아들의 병이 깨끗하게 나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마을에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다시 저를 평신도 선교사에서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목회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해 “목회는 품어야 하는데 나는 못합니다”라고 항변을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목회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2002년 달라스의 Southwesten 침례신학대학원에서 M.Div 과정을 마쳤고, 2004년 현재의 나눔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혀 있는 파이프 라인 속의 찌꺼기를 청소하여 하나님과 막힘없이 교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요즘 조금씩 감이 오는데 목회란 주님 안에서 오직 감사하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또한 ‘말씀과 삶’, 이것이 없이는 저의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의 비전 역시 ‘말씀과 삶을 나눔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가족으로는 김진숙 사모와의 사이에 아들 안희재, 큰딸 정현, 둘째딸 소영이 있습니다.
나눔 교회
주소: 4561 N. Josey In.,
Carrollton, TX 75010
문의: 469-684-0037
대담·정리 이에스더 기자
24년간 평신도 선교사로 살았던 삶을 정리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안지영 목사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평신도 선교사로 있다가 왜 목사가 되었느냐?”
평신도 선교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80년대 초, 선교사로 떠나는 그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목사가 아니라도 선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교회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선교사역을 마감할 때까지 신학을 하지 않았던 안 선교사는 선교사역의 반을 넘어설 무렵,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혀있는 영적 파이프 라인을 뚫어주는 일이 목회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목회현장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매달릴 때, 그의 영혼 또한 생명력을 얻고 있었다고 전한다.
전세계에 수많은 언어들이 있지만, 그 언어들 가운데도 성경이 없는 부족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자연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성경번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80년, 대학에 복학한 4학년 때 광주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현실을 보며 ‘한국에서는 소망이 없다’는 생각에 유학을 준비하였습니다. 같은 해, 8월 여의도에서는 복음화대성회가 열려 200만의 크리스천들이 모였고 80만의 군중들이 비를 맞으며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선교강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비를 맞으며 기도한다는 소식에 눈물이 나면서, 제가 마치 하늘 위에서 여의도 광장을 내려다 보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주님은 얼마나 아프실까?”, “내가 이 민족을 사랑하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유학이 아니라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오후 강의 시간에 Ralph Winter 박사는 “이 시대에 여러분 중에서 민족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선교지로 가라”라는 도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날 밤 모든 강의가 끝나고 혼자 강의실에 남아 기도하기를 “선교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말씀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룹성경공부 시간에 말씀을 듣던 중, 하나님의 Calling을 확인했습니다. 선교사 훈련을 위해 미국으로 가기로 했는데 비자문제가 그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러 가는데 하나님이 직접 도와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세번째로 부르심을 확인시켜 주셨고, 저는 미국의 위클리프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위클리프에서의 3년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며 “선교사로 나가는 것과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하고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3년의 미국생활 속에서 이민교회의 문제들을 보게 하셨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미래는 교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한국의 선교단체에서 잠시 일하는 동안 말씀과 삶이 분리된 수많은 목회자들을 만나며 마음의 부담, 불편함이 왔습니다. 목회자보다는 여러곳을 다니며 말씀을 전할 기회가 많아, 틈만 나면 메시지에 말씀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1986년 12월 파푸아 뉴기니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선교사 훈련을 마친지 2년만에 드디어 선교지의 땅을 밟은 것입니다.
“드디어 내가 여기에 왔구나”하는 감격과 “하나님, 이 땅에 제가 왔습니다”라는 감사를 드리기도 전에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내가 생각했던 나라가 아니구나”하는 것을 숨막히는 열기와 함께 느끼게 되었죠.
쥐벼룩에 온 몸을 물리며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소형 비행기로 위클리프 선교본부로 이동하였습니다. 어렵게 도착한 선교본부에서의 생활은 처음 겪어보는 지진과 다친 허리의 재발로 인한 통증, 큰 아이의 폐렴, 작은 아이의 한 달이상 계속되는 설사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하나님을 원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시편 1장 6절의 말씀으로 저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셨습니다.
흔히 우리는 ‘형통의 삶’에 대해 착각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 진정한 형통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고,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와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위클리프를 만나 성경번역의 사역을 하였으나 성경번역이 목적이 아니라 번역은 도구일 뿐, ‘제자 삼으라’는 목적아래 부족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또 다른 제자를 만드는 것이 저의 사역이었습니다.
1986~2002년까지 파푸아뉴기니의 성경번역 선교사로 사역하며 과하티케 부족어로 신약성경을 봉헌하였습니다. 당시 어느 부족은 복음을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로 만들어진 성경의 영화 상영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인지 모른 채 영화를 보러 와서는 마치 물을 꿀꺽꿀꺽 마시듯 영화 내용을 시원하게 이해하며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마을의 한 형제가 영화속의 성경 말씀을 전하였을 때, 그들은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또 마을 지도자의 아들이 병이 들어 온갖 굿을 다 하였으나 병이 낫지 않아 고생할 때, 그의 아버지가 와서 기도를 받고 집에 돌아가 보니 아들의 병이 깨끗하게 나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마을에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다시 저를 평신도 선교사에서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목회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해 “목회는 품어야 하는데 나는 못합니다”라고 항변을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목회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2002년 달라스의 Southwesten 침례신학대학원에서 M.Div 과정을 마쳤고, 2004년 현재의 나눔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혀 있는 파이프 라인 속의 찌꺼기를 청소하여 하나님과 막힘없이 교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요즘 조금씩 감이 오는데 목회란 주님 안에서 오직 감사하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또한 ‘말씀과 삶’, 이것이 없이는 저의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의 비전 역시 ‘말씀과 삶을 나눔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가족으로는 김진숙 사모와의 사이에 아들 안희재, 큰딸 정현, 둘째딸 소영이 있습니다.
나눔 교회
주소: 4561 N. Josey In.,
Carrollton, TX 75010
문의: 469-684-0037
대담·정리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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