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Steve Kim) 집사 / Triumph at Last: A Korean-American Life 저자
- 작성자 : 고신관리자
- 12-06-30 17:17
삶의 언덕에서 부는 승리의 나팔
김수현 집사에게 조국이란, 설움과 고통을 가슴 가득 던져놓은 곳이면서도 그리워 달려가고 싶은 곳이다. 그가 조국에서의 생활과 40여년의 이민생활을 엮어 자서전 ‘삶의 언덕에서’를 2007년 집필한 데 이어, 지난 4월 영어 자서전인 ‘Triumph at Last: A Korean-American Life’를 출간했다. 70세 남짓에 굳이 지난 경험을 그려모은 것은 그 세대가 겪은 배고픔이 인생에서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그러나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삶의 깨달음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상당히 험했다. 그저 남이 밟으면 밟는대로, 눈물을 삼키며 이리저리 옮겨다녀야만 하는 의미 없는 존재 같았다. 내 나이 9세에 조국이 일본에서 해방되어 아버지가 한국에 왔는데, 여덟 형제를 비롯한 식구가 먹고 살 길이 없어 3개월 사이에 세 명이 굶어죽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일본을 간다고 하면서 형제들을 데리고 떠났는데, ‘남자는 돈이 없으면 여자를 챙기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 밑에서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던 내게 집이란 악마의 소굴과 같았다.
그러던 중, 동사무소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한 전도사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버지는 양반 가문에 예수 믿고 위신 깎인다고 비난했지만, 나는 삼신 할매 꿈보다 요셉 꿈이 나은 것 같았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얘기를 듣고, 나도 열일곱살에 가출을 했다. 어디를 가나 구걸하기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해서 요셉처럼 타향에서 출세해야겠다며 간절히 기도했다.
가출한 이튿날 ‘왜 나만 갈 데가 없는지’ 하는 생각에 하늘을 쳐다보고 하염없이 울었다. 정처 없이 걷다보니 3일 만에 포항에 도착했는데, 미 해병대가 초콜렛도 주고, 노래 <스와니강>도 가르쳐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책을 주었다. 나는 50년 전 그 노래 책을 아직도 갖고 있다. 아마도 그날 미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운이 좋아, 포항의 한 동사무소 급사가 됐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 중퇴였다. 그래서 학교에 가기 위해 나이 4년을 줄여 1940년 생으로 등록했고, 김진하 선생(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의 도움으로 19세에 중학교 2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교회를 가면, 가난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냄새 나는 옷을 입고 있던 나를 보고 장로, 권사들이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나는 등록금을 내지 못해 중 3때 퇴학을 당했다. 어른들은 걸핏하며 욕하고 때리고, 없는 사람이나 병신의 자식은 누구나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늘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목표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를 붙잡고, 도와줄 사람을 찾아갔다. 그 도움으로 대구의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24세에 대구상고를 졸업했고, 군 입대를 했는데, 국방부로 발령이 났다.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마음에 교회로 달려가 기도했다. 이승만 대통령 아들 이강석과도 인연을 맺고,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제대 후에 영남대 토목과로 전과를 했는데, 여전히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어렸을 때는 얻어먹으러 다니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다. 자살을 시도했지만 깨어보니 대전 도립병원이었다. 자살 시도 후 나흘째 되는 날이었고, 꿈에 예수님께서 위로하시며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이후 토목기사가 되었는데, 뒷 배경이 없는데도 일이 잘 풀렸다. 그런 나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월남에서 미 해군소에 들어갔고, 1969년 10월에 미국 이민 신청을 했다.
연고도 없이 애틀랜타에 도착하고, 우연히 아내가 한국인인 공항 직원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게 됐으며, 토목 기사로 취직이 됐다. 만남이란 참 신기하다. 나는 무엇을 해도 잘 됐다. 화력발전소도 설계한 일류 기술자가 됐고, 사우디 아라비아 150억불 공장 건립시 수석 엔지니어로 일했다. 돈을 모아 리쿼스토어를 매입했고, 지금은 썩 괜찮은 규모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배우기 위해 매일 공부를 했는데, 하교해 내 옆에서 같이 공부한 아이들이 박사가 됐다. 큰 딸은 약학박사, 둘째는 치과의사, 셋째는 엔지니어다.
나는 조석환 목사, 박성룡 전도사, 오갑수 장로와 함께 아틀란타 한인감리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록 펠러가 부자가 된 이유는 출애굽기 2장 3절에서 역청이 석유의 원료라는 것을 깨닫고 블랙 오일을 찾으러 떠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역사를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만, 성경에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대상으로 5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며, 내 스스로 5개 계획을 세웠다. 대학 졸업장, 부의 축적, 아이들이 박사되는 것, 집 건축, 자서전 집필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을 이루어주신 올해는 최고로 기쁜 해다.
나는 미국 회사를 다니면서 힘이 아닌 꾀를 내어 미국 엔지니어 세 명을 쫓아낸 적이 있다. 한 번은 오하이오대 토목과를 졸업한 사람이 입사했길래 내가 아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줬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내 상사가 되어 거들먹거렸다. 그 때 사회는 총질없는 전쟁이고,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태하면 도태된다. 그가 성과가 없어 해고당하기까지 나는 그를 돕지 않았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던 한 직원이 뒤에서 나를 쳤는데, 나는 바로 그를 다시 쳤고, 백인들이 다시는 건드리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아부해야 살아남지, 실력 있다고 과시하면 언제 잘릴 지 모른다. 한국 사람들이 그걸 잘 못한다. 그래서 살아갈 구멍을 찾던지 고개 숙이던지 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벽을 뚫고 나간다.
남이 즐길 때 나는 공부했다. 이기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은 노력에서 나온다. 노력하지 않으면 진다. 요즘 젊은이들은 투쟁심이 없고, 편한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워낙 악착같이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을 보면 좀 한심하다. 박력있고, 하려는 의욕이 있었으면 좋겠다. 재치와 용기를 갖고 미국 사회에 당당하게 섰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하려고 마음 먹은 것이 있으면 최선을 다하라. 레슬링을 했던 둘째 아이가 공부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5년 동안만 무게 있는 짐을 지고 달리면, 남은 여생은 가벼운 짐을 지고 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짐을 지고 가야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기도를 할 때, 행동을 함께 해야 한다. 열심히 살면 아무 관계 없는 주위 사람들도 보고 이끌어준다. 그것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내 위치에 대한 꾀가 있어야 한다. 때로는 들이받고, 때로는 억누르는 것도 자기 스스로의 노력이다.”
김수현 집사는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나 스스로 먼저 만들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대신 세워줄 수 없다.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주님께 기도하고 도전하라”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보잘 것 없이 바라보는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며 일어섰듯이, 주 안에서 참 인생을 찾고 노력하는 희망들을 위해 도전의 나팔을 불었다.
대담,정리 강지연 기자
△한국어로 출간된 간증집(왼쪽)과 이번에 새로 출간된 영문판
김수현 집사에게 조국이란, 설움과 고통을 가슴 가득 던져놓은 곳이면서도 그리워 달려가고 싶은 곳이다. 그가 조국에서의 생활과 40여년의 이민생활을 엮어 자서전 ‘삶의 언덕에서’를 2007년 집필한 데 이어, 지난 4월 영어 자서전인 ‘Triumph at Last: A Korean-American Life’를 출간했다. 70세 남짓에 굳이 지난 경험을 그려모은 것은 그 세대가 겪은 배고픔이 인생에서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그러나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삶의 깨달음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상당히 험했다. 그저 남이 밟으면 밟는대로, 눈물을 삼키며 이리저리 옮겨다녀야만 하는 의미 없는 존재 같았다. 내 나이 9세에 조국이 일본에서 해방되어 아버지가 한국에 왔는데, 여덟 형제를 비롯한 식구가 먹고 살 길이 없어 3개월 사이에 세 명이 굶어죽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일본을 간다고 하면서 형제들을 데리고 떠났는데, ‘남자는 돈이 없으면 여자를 챙기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 밑에서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던 내게 집이란 악마의 소굴과 같았다.
그러던 중, 동사무소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한 전도사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버지는 양반 가문에 예수 믿고 위신 깎인다고 비난했지만, 나는 삼신 할매 꿈보다 요셉 꿈이 나은 것 같았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얘기를 듣고, 나도 열일곱살에 가출을 했다. 어디를 가나 구걸하기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해서 요셉처럼 타향에서 출세해야겠다며 간절히 기도했다.
가출한 이튿날 ‘왜 나만 갈 데가 없는지’ 하는 생각에 하늘을 쳐다보고 하염없이 울었다. 정처 없이 걷다보니 3일 만에 포항에 도착했는데, 미 해병대가 초콜렛도 주고, 노래 <스와니강>도 가르쳐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책을 주었다. 나는 50년 전 그 노래 책을 아직도 갖고 있다. 아마도 그날 미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운이 좋아, 포항의 한 동사무소 급사가 됐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 중퇴였다. 그래서 학교에 가기 위해 나이 4년을 줄여 1940년 생으로 등록했고, 김진하 선생(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의 도움으로 19세에 중학교 2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교회를 가면, 가난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냄새 나는 옷을 입고 있던 나를 보고 장로, 권사들이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나는 등록금을 내지 못해 중 3때 퇴학을 당했다. 어른들은 걸핏하며 욕하고 때리고, 없는 사람이나 병신의 자식은 누구나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늘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목표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를 붙잡고, 도와줄 사람을 찾아갔다. 그 도움으로 대구의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24세에 대구상고를 졸업했고, 군 입대를 했는데, 국방부로 발령이 났다.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마음에 교회로 달려가 기도했다. 이승만 대통령 아들 이강석과도 인연을 맺고,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제대 후에 영남대 토목과로 전과를 했는데, 여전히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어렸을 때는 얻어먹으러 다니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다. 자살을 시도했지만 깨어보니 대전 도립병원이었다. 자살 시도 후 나흘째 되는 날이었고, 꿈에 예수님께서 위로하시며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이후 토목기사가 되었는데, 뒷 배경이 없는데도 일이 잘 풀렸다. 그런 나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월남에서 미 해군소에 들어갔고, 1969년 10월에 미국 이민 신청을 했다.
연고도 없이 애틀랜타에 도착하고, 우연히 아내가 한국인인 공항 직원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게 됐으며, 토목 기사로 취직이 됐다. 만남이란 참 신기하다. 나는 무엇을 해도 잘 됐다. 화력발전소도 설계한 일류 기술자가 됐고, 사우디 아라비아 150억불 공장 건립시 수석 엔지니어로 일했다. 돈을 모아 리쿼스토어를 매입했고, 지금은 썩 괜찮은 규모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배우기 위해 매일 공부를 했는데, 하교해 내 옆에서 같이 공부한 아이들이 박사가 됐다. 큰 딸은 약학박사, 둘째는 치과의사, 셋째는 엔지니어다.
나는 조석환 목사, 박성룡 전도사, 오갑수 장로와 함께 아틀란타 한인감리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록 펠러가 부자가 된 이유는 출애굽기 2장 3절에서 역청이 석유의 원료라는 것을 깨닫고 블랙 오일을 찾으러 떠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역사를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만, 성경에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대상으로 5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며, 내 스스로 5개 계획을 세웠다. 대학 졸업장, 부의 축적, 아이들이 박사되는 것, 집 건축, 자서전 집필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을 이루어주신 올해는 최고로 기쁜 해다.
나는 미국 회사를 다니면서 힘이 아닌 꾀를 내어 미국 엔지니어 세 명을 쫓아낸 적이 있다. 한 번은 오하이오대 토목과를 졸업한 사람이 입사했길래 내가 아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줬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내 상사가 되어 거들먹거렸다. 그 때 사회는 총질없는 전쟁이고,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태하면 도태된다. 그가 성과가 없어 해고당하기까지 나는 그를 돕지 않았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던 한 직원이 뒤에서 나를 쳤는데, 나는 바로 그를 다시 쳤고, 백인들이 다시는 건드리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아부해야 살아남지, 실력 있다고 과시하면 언제 잘릴 지 모른다. 한국 사람들이 그걸 잘 못한다. 그래서 살아갈 구멍을 찾던지 고개 숙이던지 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벽을 뚫고 나간다.
남이 즐길 때 나는 공부했다. 이기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은 노력에서 나온다. 노력하지 않으면 진다. 요즘 젊은이들은 투쟁심이 없고, 편한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워낙 악착같이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을 보면 좀 한심하다. 박력있고, 하려는 의욕이 있었으면 좋겠다. 재치와 용기를 갖고 미국 사회에 당당하게 섰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하려고 마음 먹은 것이 있으면 최선을 다하라. 레슬링을 했던 둘째 아이가 공부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5년 동안만 무게 있는 짐을 지고 달리면, 남은 여생은 가벼운 짐을 지고 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짐을 지고 가야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기도를 할 때, 행동을 함께 해야 한다. 열심히 살면 아무 관계 없는 주위 사람들도 보고 이끌어준다. 그것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내 위치에 대한 꾀가 있어야 한다. 때로는 들이받고, 때로는 억누르는 것도 자기 스스로의 노력이다.”
김수현 집사는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나 스스로 먼저 만들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대신 세워줄 수 없다.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주님께 기도하고 도전하라”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보잘 것 없이 바라보는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며 일어섰듯이, 주 안에서 참 인생을 찾고 노력하는 희망들을 위해 도전의 나팔을 불었다.
대담,정리 강지연 기자
△한국어로 출간된 간증집(왼쪽)과 이번에 새로 출간된 영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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