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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재미총회 40년] 9. 재미총회의 신앙적 뿌리


9. 재미총회의 신앙적 뿌리

                                                                                                          나삼진 목사(Evangelia University 교수)

재미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올곧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이어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면서 투옥된 이들 가운데 주기철 목사는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목사 등은 6년의 옥고를 치루던 중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한상동 목사의 옥중 비전과 교회쇄신운동의 일환으로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가 개교되었고, 총회의 교권주의자들과 갈등을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가 총회에서 단절되면서 1952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가 조직되었다. 재미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한부선, 손양원, 이약신, 송상석, 한명동 목사 등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설립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한상동(1901-1976)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문창교회에 시무하면서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한 후 경찰의 강압으로 교회를 사면하였고, 경남지역에서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다 투옥, 6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독일이 패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본도 패망할 것을 내다보았고, 이때부터 해방 후 한국교회를 위해 신학교 설립 등을 위해 기도했다. 그는 해방 후 주기철 목사의 후임으로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던 중 공산정권의 압박과 모친 별세로 남하, 초량교회를 시무하면서 옥중의 이상을 따라 고려신학교를 설립, 목회자를 양성했다.

주남선(1888-1951)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운동으로 2년의 옥고를 치루었던 애국지사로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6년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거창교회를 시무하며 고려신학교 초대이사장으로 봉사하였다.

박윤선(1905-1988)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자유대학에 수학하였다. 고려신학교 설립 때부터 14년 동안 교수와 교장으로 봉사하며 목회자 양성과 고신교회의 신학의 터를 닦았다. 평생 성경 66권 주석을 간행한 공로로 1979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개교 50주년에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부선(1903-1992) 선교사는 한국 초기 선교사 한위렴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선교사 자녀 들 부부가 되었고, 미국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만주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 포로교환 형식으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해방 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와 함께 평생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손양원(1902-1950) 목사는 신실한 신앙인이요 독립운동가 손종일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사참배 반대로 6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해방 후 여수 애양원교회를 시무하며 전국적인 부흥회를 이끌면서 고려신학교 초대총무를 역임하였다. 여수순천반란사건 때 아들 동인과 동신이 순교하였고, 자신도 한국전쟁기에 순교하여 삼부자 순교의 역사를 이루었다. 아들의 순교에 가담하였던 안재선을 죽음에서 구하고 양아들로 받아들여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렸다.

이약신(1898-1957) 목사는 평안도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에서 주기철과 만난 것을 계기로 경남지역에 정착했으며,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에 참여, 고려신학교와 경남(법통)노회의 대변자였고, 고신총노회 창립 후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목회와 함께 희망원을 설립해 고아원 사역을 했다.

송상석(1896-1980)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재학중에 조만식 선생과 채필근 목사를 모시고 절제운동을 전개하였고,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를 편집하였다. 해방 후 고려신학교 설립기에 만주에 있던 박형룡 박사를 모시고 오는 공을 세웠고, 고신교회 중기에 기독교보 창간, 목회자 은급제 시행, 역사 자료 편집 등 행정 부문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한명동(1909-2001) 목사는 문창교회 시절 주기철 목사의 협력자로서 그의 권고로 일본에 유학, 고베신학교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몇 교회를 개척하다가 귀국 영도교회를 시무하며 제2, 3영도교회 분립 개척을 이끌었다. 고려신학교가 개교하면서 학교 관리를 위해 봉사하며 부산남교회를 개척, 대형교회를 일구었고, 칼빈대학을 설립해 많은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했다.

사진: 고려신학교 설립자들과 교수들(1946) 오른쪽에서부터 한상동, 박윤선, 주남선, 한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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