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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51. 고신교회의 연합운동과 국제관계


고신역사 70년 역사 산책 

51. 고신교회의 연합운동과 국제관계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하면서 한국교회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로교회가 주류를 형성하는 교회가 되었다. 각 선교부는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선교지 분할정책을 채택하였고, 1952년 고신측이 장로교 총회에서 추방될 때까지 단일 장로교단을 이루었다. 그러나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각 지역이 선교부의 신앙과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훗날 교단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호주장로교회의 관할이었던 부산경남은 고신측이 강세를 보이고, 캐나다 장로교회가 주된 선교구역이었던 함경도와 북간도는 기장측이 강세를 보이는 것은 그러한 이유이기도 하다. 통합측과 합동측은 전국 지역을 골고루 양분한 형국이 되었다.

고신교회는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4대장로교 선교부가 아니라 미국정통장로교회와 성경장로교회 선교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부선 선교사가 고려신학교 개교 초기부터 협력하였고, 훗날 하도례 선교사가 합류했으며, 함일돈, 마두원, 최의손 등 성경장로회 소속 선교사들도 고신교회의 형성기에 함께 동역해 큰 원군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온 세계는 전쟁의 깊은 상처를 입었고, 전쟁이 끝난 후 교회 연합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48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조직될 때 많은 개신교단이 함께 했고, WCC문제는 1959년 한국장로교회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되는 요인이 되었다.

고신교회는 초기부터 세계교회협의회의 입장을 반대하였고, 고신교회와 고려신학교는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멕킨타이어의 신학과 분리주의적 입장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WCC의 입장을 반대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고신교회는 초기에 ICCC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것은 마두원, 최의손 등의 선교사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신교회는 ICCC와 멕킨타이어 박사의 분리주의적인 경향으로 정식으로 가입하지는 않고, 우호관계만 유지하였다. 초기부터 고신교회와 협력했던 마두원, 최의손 선교사 등은 1962년 한국에서 성경장로교회 교단이 창립될 때 고신을 떠났고, 이후 함께하지 못했다.

고신교회가 국제기구에 처음 참여하기는 1954년 ICCC 제3차 대회에 업저브 자격으로 동참한 것이 최초의 일이었다. 이 대회에 참가하였던 한상동 목사가 대회에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 그리고 고신교회의 시작과 성장을 소개하였고, 이때 박윤선 교장과 한상동 목사가 페이스신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신교회는 1982년 네덜란드 흐로닝건에서 국제개혁교회협의회(ICRC)가 창립될 때 고신대학장 이근삼 박사를 파송하여 창설교단으로 참여했고, 제2차(1989, 캐니다), 제3차(1993, 네덜란드)에서 개최될 때 이근삼, 오병세, 허순길 교수 등이 꾸준히 참가했다. 1997년 제4차 대회를 서울 서문교회에서 개최하면서 고신교회가 주관교단이 되었고, 총회에서 허순길 교수가 의장으로 대회를 이끌었다. 2026년 대회를 고신교단이 주관교단이 되어 한국에서 개최하게 된다.

고신교회는 지금의 송도 캠퍼스를 마련하면서 두 차례 외국의 형제교단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먼저는 1954년 송도부지 확보한 후 첫 교사와 복음병원을 건축할 때 미국개혁교회(CRC)의 후원을 받았다. 마두원, 한부선 두 선교사가 미군 부대와의 교섭해 토목공사와 건축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2차로는 송도본관 건축(1975)에 네덜란드개혁교회에서 교단적인 모금으로 건축을 지원해 본관을 완성했다.

고신교회는 한국전쟁 후 초기 서울지역에 교세가 크게 확장된 일이 있었으나 경기노회 보류파들의 이탈로 수도권 교세가 약해졌고, 1956년 경기노회가 조직된 후 1985년 충청노회가 조직될 때까지 30년 동안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와 강원도까지 광활한 지역의 교회를 관장했다.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성장하였지만, 고신교회는 서울지역의 교회들이 열악한 실정이었다. 고신교회는 제26회 총회에서 대정부 관련 사무를 위해 총무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고, 민영완 목사가 총회장 임기를 마치면서 총무실 설치를 건의하고, 총무로 자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1년에 접어들면서 장로교단의 협의체 구성이 요청되면서 한국장로교연합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의 입장을 통일하고, 대정부 문제 협의를 위한 기구였다. 장로교협의회 창설교단으로 당시만해도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정통성을 가진 통합측, 합동측, 고신측, 기장측 등 4대장로교단과 대신측이 창설교단으로 참여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1970년대의 교회성장으로 교세가 확장되었지만, 한국교회에 극심한 교단분열이 일어났다. 학자들은 교단분열에 신학적 이유를 찾고 있으나 이는 표면에 불과하고, 지역적인 연고, 신앙적 컬러, 목회자들의 교권에의 욕망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한국교회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가 조직되고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에 각 교단이 함께 연합하였다. 때를 맞추어 통일찬송가 편찬 작업으로 전국교회가 통일된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의 선교역량이 크게 신장되면서 선교운동이 활발해졌고, 1989년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발족될 때 참여, 창설교단이 되었으나, 훗날 한기총이 변질되면서 주류교단들과 함께 이탈하였고, 지금은 한국교회 연합에 참여하고 있다. 제주선교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장로교회 100회 총회(2012) 때 중요교단들이 제주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연합예배도 드렸지만, 고신교단은 대표단만 파송했다.

교단적인 기구는 아니지만,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초대회장 옥한흠)에 고신목회자들도 함께 참가하였고, 필자도 홍보출판위원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한 바 있다. 각 교단의 젊은 목회자들의 갱신그룹이 참여한 이 협의회는 한때 한국기독교교단장협의회를 조직하고, 교단간 협력 체계를 갖추기도 했으나, 이들도 각 교단에서 리더십을 갖게 되면서 문제도 없지 않아 그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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