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 ①
- 작성자 : Henry Park
- 20-04-18 16:58
7인의 선발대(미 남장로회 호남선교) -1892년 입국
호남지방에 복음이 들어 오기 시작한 것은 1893년 2월경이다.
1891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이해 본국에 들어갔을 때 미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 상황 보고와 강연을
했는데, 1891년 9월 시카고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한국 선교에 관해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때에 신학생 테이트(Lewis Boyd Tate, 최덕의 崔義德) 선교사가 감동을 받았다. 또 1891년 10월에 테네시 주
내쉬빌(Nashville)에서 개최된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연합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 주최의
집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밴더빌트(Vanderbilt)대학교 유학생이던 윤치호(尹致昊)를 강사로 초청해 한국 선교에 관한
강연을 듣고 한국의 현재 정세와 장래에 대해서 문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벅찬 감격으로 강연을 들은 맥코믹신학교의 테이트 선교사와 리치몬드(Richmond)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학생 존슨(Cameron Johnson) 선교사, 레이널즈(William Davis Reynolds, 이눌서 李訥瑞) 선교사, 전킨
(William McCleary Junkin, 전위렴 全緯廉) 선교사 등 네사람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테이트는 지체하지 않고
미 남장로교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한국) 선교사 지원서를 냈다. 다른 세 사람도 이어서 지원했다.
그러나 남장로회 외지 선교부는 은자(隱者)의 나라(the Hermit Nation)로 알려진 조선(한국)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고, 재정적인 이유와 그 지역 선교에 관심을 아직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선교사 청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적인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결속해 조선(한국) 선교에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과 전킨 선교사의 신부 레이번(Mary
Leyburn) 선교사 등이 동참, 가세했다. 그들은 기도하며 선교 본부를 깨우치는 방도를 강구하기로 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미국 남장로회의 지역인 버지니아 주, 북캐롤라이나 주, 테네시 주 등에 있는 주요 교회들을 순방해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언더우드는 쾌히 승낙하고 각 지역의 교회는 물론 각 신학교, 노회, 교계의 각종 집회
등에 나가서 조선(한국)의 형편을 설명하고 조선(한국) 선교의 긴급성을 역설했다.
그들의 열성은 더욱 높아져 교회 잡지에도 조선(한국) 선교에 관한 논문을 투고하며 1892년 2월에는 <선교(The
Missionary)>라는 잡지에 “왜 우리는 조선(한국)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을 실어 조선(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주장
했다. 또한 그들은 ‘조선(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인가, 아닌가’의 중대한 일을 앞에 놓고 매일 오후 3시를 기도의
시간으로 정하고 기숙사의 방문을 닫고 마음을 같이해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구했다. 그들은 2년 안에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합심 기도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으로서 사업가이고, 미 북장로회 선교 위원인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장로가
해외 선교 자금이 부족해 고민중인 남장로회 선교부에 3천 달러를 보내온 것이었다. 여기에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 자신도
5백 달러를 보태어 보냄으로써 남장로회 선교부는 용기를 얻고 때마침 그리스 선교 방침을 중단하게 됨으로써 한국 선교
사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하고 있는 그들에게‘8월에 떠날 준비를 하라’는 승낙 전보를 보내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 형제는 북장로회인이었음에도 남장로회의조선(한국) 선교를 위해 교단을 초월해, 자진해서 도왔다.
그래서 초대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언더우드 선교사를 ‘남장로회 조선(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미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 3명의남선교사와 이미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지원을 한 매티, 볼링,
레이번, 데이비스 등 4명의 여선교사 등 모두 7명의 선교사를 초대 조선(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이들을 ‘7인의 선발대
(Seven Pioneers)’라고 일컫게 되었다.
1892년 7월 7일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남 장로교 소속 목사들과 해외선교부 직원 그리고 가족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조선(한국)을 향하여 떠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전킨 선교사가 후두염으로 인하여 수술을 받게 되어 함께 떠나지
못하였다. 또한 레이놀즈 부부도 일주일 동안 전킨을 기다리게 되어 테이트와 누이 메티 테이트, 데이비스 이렇게 3명만
먼저 떠나오게 되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테이트 선교사와 그 누이동생 매티 선교사와 일행이 되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오는데 마침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관 이자윤 서기관의 부인인 이씨가 함께 승선해 장기간의 항해를 하게 되었는 데 도중에
두 여인은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revpark0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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