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로마 가톨릭교희 기원과 형성 ① AD 300~
- 작성자 : Henry Park
- 21-12-07 13:35
로마 가톨릭의 기원과 형성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 로마에서 발생한 기독교 교파로서 교황을 최고 수장으로 삼고 있다.
‘가톨릭’이란 말은 그리스어 ‘카토리코스’에서 유래한 말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스스로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제2차 로마가톨릭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라고 칭하고 있다. (자칭
공의회 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 가톨릭은 사도로 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사라지도록 만든
장본인이며 수많은 기독교 교파 중의 하나 일 뿐이다.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로마 가톨릭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해 기독교의 종교개혁 이전의 근원 또는 큰집 정도로
이해하는 무지에 빠져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의 뿌리는 로마 가톨릭 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이어져 왔고,
우리 자신들도 개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말할 정도로 원형은 로마 가톨릭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둔 것이지, 로마 가톨릭에 뿌리를 둔 것이 결코 아니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에 없는 하나의 유사 종교, 다시 말해 사악한 이단일 뿐이지, 절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영국의 사회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A.D. Smith, 1723~1790)는 그의 명저 <국부론>에서 “로마 가톨릭은
국가 정부의 권위와 안전에 대적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복지에 대적 하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가공할 만한 조직체”라고 했다.
또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학자 크레이톤(Mandell Creighton, 1843~1901)은 “로마 천주교회는 전혀 교회가
아니다. 조직에 있어서 하나의 국가다. 그것도 사악한 형태의 국가 즉, 전제 독재국가.” 라고 했다. 또한 이그나티우스
사제로 불렸던 스펜서 경은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마귀의 걸작품”이라고 말했다.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여러 교회들 중에 하나인 작은 로마 교회가 A.D. 300년경 거대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과정에서 여러 세상 종교와 혼합되어 나타난 것이 가톨릭이다. 초대교회를 계승한 정통 기독교가 아니다. 역사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심각하게 변질,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로마는 처음부터 살인자로, 우리 주님을 처형한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직적으로 죽여 온 전통적인 도시다.
그 후 온 유럽과 식민지의 피로 살쪄온 로마, 세계에서 로마보다 더 절묘한 우상으로 꽉 찬 도시는 없다.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와 전혀 다른 바벨론의 여신 사상, 고대 이집트 태양 신 숭배 사상과 혼합된 로마의 신생 종교일
뿐이다.
3세기까지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로마교회가 중세를 장악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되고, 지방 교회의 일개 장로에 불과했던 로마교회의 감독이 세계 교회의 머리가 되어 중세를 호령한
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A.D. 306-337)과 유스티니안(A.D. 527-565)은 교황을 양육하여 중세의 주인으로 성장시킨 대표적인 황제
들이다. 312년 10월 27일 콘스탄틴 황제의 꿈과 환상으로 나타났다는 ‘불붙는 광채의 십자가’를 힘입어 적이었던
막센티우스 황제를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이긴 뒤,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태도는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313년 3월 ‘밀라노의 칙령’이 반포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세금 및
각종 시민의 의무가 면제되고, 사법 상의 특전도 베풀어져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성직
제도는 빠른 속도로 타락하여 성직 매매가 성행했고, 민중의 호응과 인기를 얻기 위해 교회의 문지방은 낮아질 대로
낮아져 세속과 이교(異敎)의 물결이 넘쳐 들어왔다. 예배는 심각하게 이교화되어 갔다. 로마 교회 감독은 황제의
이러한 종교정책을 열렬히 환영하며 국가의 비위 를 맞추면서 꾸준히 정치적 기반을 굳혀 갔다.
326년 콘스탄틴 황제는 황후 파우스타(Fausta)의 라테란 궁전을 로마교회 감독 실베스터(Sylvester)에게 주어 공관을
삼게 했다.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게 되자,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교권을 확장하게 됐다.
375년까지 로마 황제들이 공식 호칭으로 쓰고 있던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 Maximus)’ 를 그리스도인인 그라시안(Gracian) 황제가 사용을 중지했다.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했던
로마교회 감독은 즉시 이를 채택하여, 자신의 칭호로 삼아 오늘날까지도 교황의 공식 칭호가 되었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뒤, 로마교회 감독은 황제의 이미지로 군림하여 정치와 종교의 실권을 장악했다. 496년
게르만 민족의 강자인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Clovis)를 개종시켜, 로마교회의 양자를 삼음으로 중세의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특히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안은 로마교회 감독이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로마의 잃어버린 통치권을 되찾고, 이전의 통일된 대제국을 이룩해 보려는 목적으로 황제는
로마교회의 영항력을 십분 이용하려 했다. 유스티니안은 493년 아리안주의(Arianism) 게르만 민족으로 하여금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교회를 위협해 온 헤루리를 정복하고, 534년에는 같은 이유로 반달족을 정복했다.
533년 로마교회 감독을 ‘세계 교회 머리’로 공식 인정하고 이 사실 을 534년에 그의 법전에 편찬했다. 538년에는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교회 감독의 지상권에 도전하는 마지막 아리안주의 게르만족인 동고트 족을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마침내 교황권을 중세의 권좌(權座)에 앉혀 놓았다. 그 뒤를 이어, 서유럽의 실력자가 된 프랑크 왕 피핀
(Pepin 741-768)은 왕위를 찬탈한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준 데 대한 감사로 로마 교황을 적극 후원하였다. 754년에는
롬바드에서 빼앗은 동로마제국의 영지를 교황에게 주어 교황령이 되게 함으로써, 로마교회는 이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피핀 왕의 아들 찰스 대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곤경에 빠진 로마 교황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원한 뒤, A.D. 800년
크리스마스에 성 베드로 사원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아 역사적인 신성 로마제국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막을 내리기까지 1,000여 년 간 교황권의 성실한 보호자 구실을 했다.
십자군을 일으켜 알비젠스, 왈덴스 등 개혁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후스와 제롬을 불사르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편의와 힘을 제공한 것이 바로 신성 로마제국이었다. 따라서 가톨릭은 초대 교회를 계승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초대교회를 핍박하고, 이방종교를 흡수한 혼합종교였고, 정치적 후원으로 성장하였으며,
권력과 금력을 얻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세상적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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