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사 열전] 3 - Dr. Willis G. Craig(윌리스 크레이그) 박사 편
- 작성자 : Henry Park
- 19-07-04 12:29
Willis G. Craig (윌리스 크레이그) 박사
한국 기독교 역사를 공부 내지 성찰할 때 1884~1910년, 이 기간 동안 섬겼던 미국 선교사들의 헌신과 열정, 특히
그들의 신학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간 동안 한국에 파송된 목사로
임직받은 선교사 들의 67%가 맥코믹 신학교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왜 특정 신학교 출신들이 거의 압도적인가? 그
배경에는 크레이그(Willis G. Craig) 박사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크레이그(Craig) 박사는 1834년 9월 24일 켄터키 주 (Kentucky) 덴빌(Danville) 시 근교의 부친의 이름을 딴
웨이브랜드(Waveland)에서 태어났다. 집 근처에 있던 센터칼리지(Center College) 에서 공부하는 동안 장로교 목사
였던 존 영(John Young) 학장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대학을 마친 후 형의 요청으로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은 농장
일을 7년 가까이 하고 그리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캔터키주 (Kentucky) 덴빌(Danville) 시에 있던 센트럴신학교
(Central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해서 1861년 강도사고시, 1862년에는 아이오와 주 키쿡 시(Keokuk, Iowa) 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Westminster Church)로 부터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로 임직하게 된다.
그가 담임하고 있던 중 그 교회는 크게 부흥 성장하게 되고 크레이그(Craig) 박사의 영적 영향력은 아이오와 (Iowa)주
전반에 미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많은 신학교와 대학들에게서 이사로 또한 교수로 초빙받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장로교 북서신학교(나중의 맥코믹 신학교,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the Northwest(McCormick
Seminary)인데 전 교인이 그의 담임목사 사임을 반대함으로 인하여 당회의 결의로 그 기간동안 아이오와(Iowa) 주와
시카고(Chicago)를 오가며 담임목사 직과 교수직을 겸직하게 된다. 그리고 장로교 북서신학교에서 10년 동안 이사로,
교수로 그리고 1년은 학장으로 섬기게 된다. 신학교에서 학장으로 재임 하고 있을 때 그 유명한 시카고 대화재(The
Great Fire of Chicago)가 1871년 발생하게 되고 신학교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1873년 그의 모교에서
목회학 박사를,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역시 같은 해 LLD(Legum Doctor) 명예법학박사를 받는다.
크레이그(Craig) 박사는 1881년까지 계속 신학교 이사로 일하고 있는 동안 신학교에서 성경신학 및 역사신학을
겸하여 가르치던 중 비로소 육체적 한계를 느낀 그를 섬기던 교회의 교인들이 그의 사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20년
가까이 목회를 한 셈이다. 1882년 가을부터 크레이그Craig) 박사는 본격적으로 신학교 교수로 봉사하게 되고 1886년
장로교 북서신학교는 맥코믹 신학교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된다. 1986년부터는 맥코믹 석좌교수로 30년 가까이
재직하는 동안 역사신학, 변증학, 선교학 등을 주로 가르치게 된다. 맥코믹 신학교를 봉사하는 동안 그는 무디 선생과
(D.L. Moody)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고 무디 (D.L. Moody) 가 창설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주요 강사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의 감화를 받은 많은 학생들이 맥코믹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1893년에는 미국장로교 총회장이 되고 1911년 7월 4일 그는 세상을 하직 후 그의 고향인 캔터키 (Kentucky) 주 덴빌
(Danville) 시에 묻히게 된다.
한국교회 초기 형성기인 1885-1910년 시기에 조선(한국)에서 사역한 안수받은 미국장로교 교단 소속 선교사 70명 중
47명이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한때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기로 깊이 고민했던 크레이그(Craig) 박사로 부터 직접
가르침과 영향을 받은 대표적 한국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1888~1905: 기포드(기보) 선교사, 마펫(마포삼열) 선교사, 베어드(배위량) 선교사, 리(이길함) 선교사, 스왈론(소아론)
선교사, 무어(모삼열) 선교사, 아담스(안의화) 선교사, 샤프 선교사, 시릴 로스 선교사, 번하이젤(편하설) 선교사,
블레어(배 위량) 선교사, 바렛(박위렴) 선교사, 클락(곽안련) 선교사, 피터스(피득) 선교사, 칼 컨즈 선교사 등. 그리고
이들 선교사들 영향으로 그후 1939년 까지 한국에 온 맥코믹 신학교 출신은 거의 60여명에 이르렀다.『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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