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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한국선교사 열전] 50-1 Charles A. Clark (찰스 클락, 곽안련 郭安連) 선교사 ①


Charles Allen Clark (찰스 클락, 곽안련 郭安連)1902년 입국

한국을 찾은 선교사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 크리스천월드

곽안련 선교사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태어났고 한국교회를 위하여 전 생애를 다 바친 사람이다.

그가 76세가 되던 때 조선(한국)에서 청춘을 바쳐 선교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공사장에서 그리고 출판계에서 얻은

고국에서의 내 경험은 학교에서 배운것과 거의 비등하였고, 그것은 나의 선교현장에서 가장 값진 보람을 안겨주었다.”

실토하리만큼 그는 한국교회를 위하여어느 누구보다 다양하게 선교에 열정을 쏟았던 선교사였다.

곽안련 선교사는 1878년 5월 14일 목수였던 아버지 윌리암 클라크(William O. Clark)와 청교도의 후예였던 어머니

릴리안 캐롤라인(Lillian Carolin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네소타(Minnesota) 주에 있는 스프링 밸리(Spring Valley)

라는 농촌마을에서 태어났으나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로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열 살이 되던 해에 폐결핵으로 어머니를 잃고 익사사고로 형을 잃은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곽안련 선교사는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10대를 후회 없이 보내고 있었다. 그가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2년을 마치자 그의 인품과 활동을 눈여겨

 보아온 노회는 그에게 맥칼리스터(MaCalester) 대학에서 남은 2년의 수학을 하고 신학교를 갈 것을 권하였다. (당시에는

중세 이후 신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큰 명예로, 또한 우수한 성적을 이수한 자들만이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는 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목사보다는 라틴어와 헬라어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수줍음을

잘 타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고, 둘째는 목사가 되면 혹시나 미개한 나라의 선교사로 나가게되는 결과가 오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가 졸업한 대학은 장로교 계열로 나일 목사(Rev. Edward D. Neill)가 1874년에 세워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교육을

시켰기에 졸업생들이 신학교에 진학을 많이 한 바있다. 이 대학에서는 그가 졸업한지 12년 후인 1911년에 명예신학박사를

선교에 혼신을 다하고 있던 곽안련 선교사에게 수여하기도 하였다.

곽안련 선교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멕코믹(MeCormick) 신학교를 입학하였으나 목사가 된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졸업하기

4개월 전이였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목사가 되는 문제에 대하여 10년 동안이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드리지 않고 격론을 벌리다가 신학교 졸업 4개월 전에야 드디어 항복을 하고 말았다. 나는 주님의 뜻에 날

맡기고 난 다음에 온종일 기쁨 속에 찬송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해외 선교사로 가는 것만은 원치 않았다.”

그에게는 해외 선교사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유로서 형을 잃고 장남의 위치에 있는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은 외아들까지 보내셨다는 메시지를 듣고 자신은 동생이 있는데도 주님이 원하시는 데로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주변에서 때마침 애송하던 찬송 “오 사랑의 주님! 산골짝이나 평원이나 바다라도 주님이

원하신 데로 나는 가오리다.”를 많이 불렀으나 자신은 그 찬송을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그는 목사가

되더라도 해외 선교사만은 피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단 선교부가 보내온 신청서의

항목을 기재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 조선(한국)을 다녀온 친구가 조선(한국)에 대한 말을 많이 했기에 먼저 조선(한국)을 그리고 중국, 일본을 지원

하였다. 그러나 원하는 곳이 아니라도 어디든지 가겠다는 항목에 깊은 고민 끝에 서명을 했기에 조선(한국)행은 불확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곽안련 선교사를 조선(한국)이 필요한 선교사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 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의 동기들 44명 중에 18명이 선교사 지망을 했다. 그 당시의 조선(한국)은 미개한 나라였고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아는 사람들이 아주 적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망생들이 조선(한국)을 지원했었는데 한방에 살던 내

친구 컨스(Kerns)와 나만이 지원한데로 조선(한국)에가게 되었다.”

1902년 9월 22일 조선(한국)의 땅 제물포에 도착한 인간 곽안련 선교사에게는 거대한 시련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조선(한국)에 발을 내려 딛을 때 당시에 가장 무서웠던 전염병 콜레라가 온 나라를 휩쓸어 수만의 생명을 앗아갔고, 이어서

천연두가 엄습하여 어린이들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계속하여 어린이들이 피해를 가장 많이 주는 전염병 성홍열(猩紅熱)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바로 이 전염병에 곽안련 선교사는 사랑하는 두 아들이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부모로서의

가장 슬프고 아픈 사연을 경험하게 되었다. 조선(한국)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한반도에 상륙하여 맞은 첫 시련치고는 실로

감당할 수 없는 비통한 슬픔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두 아들을 선교의 땅에 묻고 일어선 곽안련 선교사는 교회를 위한 대담한

행진을 계속하였다.

곽안련 선교사가 1922년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봉직하기 위하여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그는 교회를 세우고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하는 목사의 길을 20년 동안 걸었다. 그가 1906년 승동교회의 담임을 하였으나 그의 목회 무대는 실로 넓었다.

그가 품고 있었던 끊임없는 전도의 열기는 150여개의 교회들을 개척하기에 이르렀으며, 자신이 당회장으로 성례를

집례해야 했던 교회가 매년 20여 교회였다. 어떤 해는 150여 교회를 책임을 지고 순회를 하였고 그런 때는 그의 절대적인

교통수단이었던 말 위에서 거의 시간을 다 보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순회하였던 지역은 서울을 비롯하여 멀리는

동해안이었다. 그가 이 넓은 지역을 동분서주 애를 쓰면서 오직 교회를 섬기고 믿지 않는 영혼들을 전도하면서 때로는

위험한 고비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나의 순회는 주로 장마철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시골에는 물이 범람하였고 중국벌래(China’s teeming millions)가

온누리에 가득했었다. 농부들은 들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와야 했었고 학습과 세례문답을 한 후에 성례를 해야 했기에

우리의 예배는 보통 밤 11시에 시작되었다. 교각은 홍수로 망가졌기에 나는 물이 불어난 위험한 개천을 건내야 했다. 어느

때는 물 깊이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물길을 해쳐 가다가건너편 사람들이 바로 앞의 물이 12자가 넘는다고 소리 질러 위험의

순간을 면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토록 어려운 여건의 목회의 길에서 언제나 보람을 느끼면서 동분서주 애를 쓰면서 목회의 현장에 우뚝 선 목사의

사명을 감수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선(한국)에 선교사로 있던 동안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를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으나 약 3천명은 넘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76세의 생일을 맞이하면서 쓴 회고록에서 그는 한국에서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는 5일 만에 한번씩 서는 장터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일이었다고 술회한다. 이 때 그의 전도방법은 3단계의 전략을 가지고 매우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revpark0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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