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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역사 아카이브] 15.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 발회와 고신교단의 시작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15.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 발회와 고신교단의 시작

고신교회(교단)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한국 장로교단들이 제104회 총회를 회집하는데, 왜 고신총회는 제71회 총회인가? 고려신학교가 1946년에 설립되었는데 왜 올해가 70주년인가? 이러한 궁금증은 고신교회 창립의 기산을 언제로 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을 갖는다. 고신교회의 창립 기산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 창립(1952. 9. 11)을 기준으로 한다.

제36회 총회(1950. 4)에는 경남(법통)노회와 전권위원이 조직한 삼분노회와 중도파까지 다섯 노회 총대 명단이 제출되었다. 제35회 총회에서 경남노회 문제 해결을 위해 전권위원을 파송했는데, 이들은 경남노회와 공식적인 회합을 갖지 않고 개인적인 의견 청취로 노회를 삼분해 경남노회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경남노회는 12명의 총대가 파송되어야 했지만, 전권위원이 다섯 노회에 4명씩 총대를 파송하게 해 총대 파송 원칙에도 맞지 않았다.

제36회 총회에서는 개회 벽두부터 총대권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다. 조선신학교측은 선교협의회에 가입되지 않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회원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장로회신학교측은 경남5노회의 총대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5일간 격론을 벌이며 공전했고, 욕설과 폭력이 난무해 무장경관이 개입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김양선의 표현대로 ‘한국교회 70년사상 처음보는 대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경남노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전권위원의 무리한 처사로 결국 보고가 기각되었고, 교권주의자들의 뜻과 달리 기존의 경남노회를 그대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총회 회무가 더 진행되지 못해 9월 1일에 속회하기로 하고, 경남노회 문제는 (특)별위원을 두어 ‘노회 병합, 조직, 해벌 등의 권한을 부여하여 경남노회 문제를 해결할 것’을 결정했는데, 두 달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 1년이 지난 후에야 속회 총회를 모였다.

그러나 그동안도 경남노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경남(법통)노회를 총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계획으로 (특)별위원은 총회 한 달을 앞두고 경남노회를 재구성하였는데, 경남노회의 본류였던 경남(법통)노회는 입장권을 받지 못해 총회에서 단절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김양선은 ‘총회의 주도권을 가진 수 삼의 교권주의자들과 그 배후에서 암약하는 수 삼 기회주의자들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몰각한 교권적 행동 때문에 출옥성도를 중심한 고려신학교측의 제외된 경남노회를 승인되어 마침내 고려신학교파는 총회의 문외로 쫒겨났다’고 했다.

총회 전권위원의 삼분노회의 조직은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단일 경남(법통)노회를 무력화시키고 총회에서 추방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고, 경남(법통)노회를 추방한 후 하나의 경남노회로 돌아갔는데, 경남노회 분리는 5년 후 1956년에 부산, 마산, 진주노회로 분립되었다.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후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던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측과의 오랜 갈등으로, 제36회 속회(1951. 4)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단절되었고, 합동측 총회 역사는 이때를 고신측 분리로 기술한다. 그러나 고신교회는 한 해를 더 기다렸고, 제37회(1952. 4) 총회에 다시 총대를 파송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제57회 경남(법통)노회(1952. 9. 9-11, 진주성남교회)에서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총노회를 조직하기로 가결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에는 경남노회가 단일노회로 속했기 때문에 총노회라는 이름으로 치리회가 구성되었다. 총노회에 속한 교회는 약 300여 교회였고, 주로 부산, 마산, 진주, 울산을 포함하는 경남에 산재한 교회들이었다. 그 외의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대구 지방, 경주 지방, 전라 지방은 지방회로 유지하도록 했고, 지방회 운영은 노회 규칙에 준하여 운영하기로 했다.

1952년 9월 11일 밤 11시 20분에 목사 50명, 장로 37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에서는 규칙을 제정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임원으로 회장 이약신, 부회장 한상동, 서기 홍순탁, 회록서기 오병세, 회록부서기 윤봉기 목사, 회계 주영문, 부회계 김인식 장로가 선출하였는데, 김인식 장로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시절에 안수를 받았기 때문에 자숙하는 의미로 사퇴하여 황성학 장로가 보선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발회한 후 9월 22일부터 10월 12일까지 3주 동안 목사, 장로, 남녀전도사들이 자숙기간을 가졌는데, 이 기간에 공예배 인도와 상례, 주례와 공중기도 인도를 중지하고, 공인죄(신사참배, 신도연맹 가입, 미소기바라이)와 자인죄를 회개하였다. 총노회는 자숙기간이 지난 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광복동 고려신학교에서 부흥회를 개최하고, 새벽기도회는 한상동 목사, 낮 성경공부와 저녁집회는 박윤선 목사가 담당했는데 첫날 천 명이 참여했다. 마지막 날 저녁집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 발회식’을 갖고,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파수군’에 실린 기사에는 영적인 전쟁 출정식같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발회식 선포문에서는 ‘한국장로회 종파 단일성과 한국장로회 임시행정기관 단일화를 위하여 최후까지 합동에 노력하여 보았으나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기에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어 ‘불법이 법화되었음, 진리의 화신으로 여기는 권위주의,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한 무조건적 사랑’의 잘못을 지적하고, ‘신학사상과 신앙노선에 따라 교회 행정이 갈라지게 된 것은 불가피한 현상’으로 정리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대로의 전통적인 장로회 총회를 계승하는 법통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총노회 발회식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발회식 선포문 기초위원은 총노회장 이약신 목사와 부회장 한상동 목사가 협의, 지명한 송상석, 이학인, 장석인, 전성도, 황철도 목사가 선정되었고, 총회에서 신학교수들을 추가하면서 박윤선 교장과 한부선 교수가 함께 했다. 송상석 목사가 기초위원장으로 이를 주도했다. 노회 분열 전(1949) 경남노회가 296교회였는데, 총회에서 단절될 때(1951) 276, 총노회 발회 직전 (1952)에는 306교회였다(파수군 195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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