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11. 학생신앙운동(SFC)의 형성과 초기 모습들
- 작성자 : 나삼진
- 22-02-19 16:13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11. 학생신앙운동(SFC)의 형성과 초기 모습들
학생신앙운동(SFC)은 고신교회 교회쇄신운동이 낳은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SFC는 대표적인 복음주의 기독학생운동으로 오늘날 100여 명 간사들이 국내와 해외 10개 지부에서 학원복음화 운동과 학생 선교 사역을 펼치고 있다.
SFC가 본격적인 학생운동으로 형성되기에는 세 갈래의 원류가 만나 하나가 되었다. 먼저, 한명동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가 논의하여 고려신학교 주최 청소년 수양회를 개최한 것이다. 1948년 8월 2일부터 엿새 동안 열린 첫 수양회는 박윤선, 한명동, 송상석, 노진현, 이상근, 이인재 목사와 한부선, 최의손, 마두원 선교사가 강사로 봉사했다. 고등학생 37명, 중학생 86명, 국민학생도 10명, 기타 22명인데 참가했는데, 기타는 강사 외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못한 이들일 것이다. 학생들은 부모들의 회개운동, 교회쇄신운동을 보고 배우며 기도하고 헌신하였다. 여름과 겨울수양회에 청소년들이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둘째는 한부선 선교사의 주한 미군과 한국 학생들을 위한 YFC(청소년신앙운동)이었다. 미국의 학생운동 역사에서 1940년대에 YFC(Youth for Christ)가 큰 역할을 했는데, 한부선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체포되었다가 미국으로 추방된 후 YFC의 활동을 보였고, 그 경험을 가진 미군들을 상대로 신앙운동을 시작했고, 한국 학생들도 함께했다. 한상동 목사와 이약신 목사도 설교를 한 일이 있었다. 유학생 이근삼은 보스톤의 YFC모임 참가기를 ‘파수군’에 싣기도 했다. 그러나 YFC는 이름을 빌린 것이지 당시 미국YFC와 연대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자주 SFC를 ‘순 국산 학생운동’이라 했다.
셋째는 한명동 목사가 이끈 학생들의 자발적인 기도모임이었던 학생신앙협조회이다. 해방 후 학생들은 여러 종류의 학생단체를 만들어 해방 이후의 자신들의 역할을 찾고자 했다. ‘진리갱생회’라는 이름으로 첫 모임을 광복교회에서 모였고, 이후 고려신학교에서 모여 기도하며 전도하다가, 1948년 11월 6일 네 번째 모임부터 ‘학생신앙협조회’라 했다. 박춘호(중앙), 손영준(광복), 배경재(항남), 이원홍(영도), 한기범(초량), 한동희(항서) 등이 교회 대표, 박성환(경남중), 한기범(부산중), 정보근(경남상업), 이인영(부산상업) 등이 학교 대표였다.
이 세 모임에 참여한 학생들은 서로 중첩되었는데, 고려신학교 주최 청소년 수양회(1948년)의 영적인 분위기가 이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였다. 수양회는 지도자들의 격려로 시작했지만, 자발적인 기도와 준비로 개최되었고, 처음에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김영진 등 고려신학교 학생들이 사무를 보았지만, 점차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수양회를 준비하였다. 부산 경남이 중심이었던 한 수양회는 제2회부터 대구와 개성에서 학생들이 참가했고, 제3회 수양회에 서울에서 홍치모가 참석하였다. 1948년 수양회 때부터 SFC가 본격적인 운동으로 형성되었는데, 한명동 목사가 기초한 SFC강령이 중심원리가 되었다. 강령은 1949년에 다음과 같은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다.
학생신앙운동 강령
1.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2.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3.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4. 우리의 생활원리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 중심, · 성경 중심, · 교회 중심
SFC는 이렇게 고신교회의 신앙과 정신을 담아내어 이후 한국교회 인재 양성의 산실이 되었다. 고신교회가 작은 교단이면서도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해 낸 것은 SFC수양회의 열매였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한 주 동안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된 학생들이 학교로 사회로 나아가 변화의 불씨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부산에 몰려들었던 피난민들이 서울로, 각각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면서 1952년 7월 21-27일 부산남교회에서 개최된 제6회 수양회를 기해, 7월 24일 각 지방 대표 18명이 참가해 전국대회를 출범하였다. 총회를 기해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된 동기’라는 짧지만 강력한 취지문을 남겼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이 1952년 중앙학생신앙운동 창립총회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앙학생신앙운동 창립총회에서는 박윤선 목사의 기도, 박손혁, 한명동 목사의 격려사가 있었고, 위원장 조용석, 부위원장 이영일과 이복임, 총무 손영준 등의 임원을 선출하였다.
SFC의 형성기 역사를 통해 SFC의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SFC는 한국에서 형성, 발전된 학생들의 순수 자발적인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이 자발성은 학생운동의 오랜 전통이었는데, SFC의 경우 어른들의 회개운동을 보며 기도하던 가운데, 회개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둘째, 수양회에 참석한 학생들은 교회쇄신운동에 앞장 섰던 한상동, 박윤선, 한부선, 한명동 목사 등의 메시지에 강력한 도전을 받았고, 이는 운동의 큰 동력이 되었다. 초기 학생신앙운동은 이들 지도자들의 강력한 신앙적인 영향을 받았다. 셋째, 학생들은 민족적, 교회적 범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자신의 신앙과 삶을 지도자로부터 배운 말씀에 비추어 철저한 생활개혁운동을 전개했다.
학생신앙운동(SFC)는 총회파로부터 억압받았던 교회쇄신운동의 아들로, 새벽이슬과 같은 청초한 모습으로 고신교회의 희망이 되었다. 교회나 세상에나 시대마다 이런 이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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