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10. 교회쇄신운동, 총회측과 갈등과 그 시대의 문서들
- 작성자 : 나삼진
- 22-02-19 16:12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10. 교회쇄신운동, 총회측과 갈등과 그 시대의 문서들
해방 후 경남노회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지역의 목회자들은 세 부류로 구분되었다. 먼저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적극 가담하고, 친일·부일의 행보를 보였지만, 해방 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출옥성도들을 억압한 이들이다.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경남교구장 김길창 목사, 부교구장 김동선 목사, 권남선 목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둘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되어 6년간 옥고를 치루고 나온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손명복 목사 등이었다. 노회에는 이들 출옥성도들의 신앙을 따르며 뒷받침하던 이약신, 송상석 등 목회자 그룹과 평신도들이 있었다. 셋째는 경남노회에서의 교회쇄신운동을 신앙운동으로만 보지않고 총회적인 리더들과 정치적인 관계도 고려하며 관망하는 노진현 목사를 비롯한 중도파가 있었다.
1946년 4월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던 한상동 목사가 공산당의 압박과 모친 별세로 남하 후, 7월에 초량교회의 청빙을 받고 진해 신학강좌를 거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면서,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쇄신운동은 두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목사가 힘을 합쳐 고려신학교를 설립해 목회자 양성을 통한 개혁주의 신학운동이었다. 박윤선 교수가 중심이 되어 「파수군」과 네 권의 「진리운동」 시리즈를 발행하며 주로 신학적으로 변증했고, 사명감에 불타는 총노회 발회 전까지 74명이 배출되었다. 다른 하나는 경남(법통)노회가 불법 분리해 나간 김길창 목사계와 총회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항의하며 신도대회, 청년대회 등 집회를 갖고, 다양한 문서를 발행했는데, 이약신 목사가 노회장으로서 그 중심에 있었다.
이약신 목사는 경남(법통)노회의 교회쇄신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경남노회의 입장을 신앙적으로 변호하고 석명하는 일을 담당했다. 경남(법통)노회와 총회측과의 갈등으로 총회측에서 과도한 교권을 행사할 때, 경남(법통)노회는 소수자로서 문서로 교권주의자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고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는 대외적으로 교회쇄신운동을 석명하였고, 대내적으로 지지하는 교회를 결속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이약신 목사는 1948년 3월 제50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가 발회되던 1952년 9월까지 3년 반 동안 여러 문서들을 발행, 교회쇄신운동을 이끌었다.
그 첫째 문서가 ‘경남노회 사건 총회전권위원회 경과상황 발표에 해답함’(1948. 6. 30)이다. 경남노회사건 총회전권위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대, 경남노회 각 교회와 기타 전국교회 등을 수신자로 하는 46배판 8면 2단 세로 쓰기로 편집된 이 문서는 경남노회장 이약신, 총대 이순필, 송상석 등 3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 문서는 총회전권위원회의 부당한 행정과 불법성을 구체적으로 고발했는데, 제35회 총회에서는 전권위원회 보고가 기각되었다.
둘째 문서는 경남노회장 이약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통고서’와 ‘항의서’(1949. 6. 23)인데, 35회 총회 전권위원회에서 총회전권위원회에서 세 노회를 조직, 통고한 것에 대해 전권위원 불신임, 노회 분립 불가, 삼분노회의 불법성을 상세히 기록해 그 결의에 불복종을 선언한다.
셋째 문서는 ‘호소와 공약선언: 대한예수교 장노회 총회와 각 노회와 성도들에게 드리는 말씀’(1949. 9)과, ‘고신당국자들의 선서문’이다. ‘호소와 공약선언’은 전권위원의 불법처사 철회 요구, 한부선 선교사의 재심 청구소 심리 요구를 하고, 고신이 이교파 수립한다는 것은 억척이요 중상적 허위선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고신당국자의 선서문’은 반대파들이 고려신학교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이교파를 창설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제52회 정기노회(1949. 9)의 결의로 고신책임자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한명동, 손양원, 송상석 등 6인의 이름으로 ‘이교파 수립을 계도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런 야심은 전연 없음'을 선언하고, 총회적인 오해를 여섯 개 항으로 정리했다. 경남(법통)노회는 이교파 설립을 표명한 바 없었다.
넷째 문서는 제36회 총회(속회, 1951. 5)를 앞두고 제53회 노회 임시노회의 결의로 상정하는 ‘진정서’(1950. 5)로 경남(법통)노회장 이약신, 교회 대표 박손혁, 한상동, 송상석 등 6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46배판 세로쓰기 2단으로 편집, 4면으로 구성된 이 문서는 총회특별위원회가 추진한 ‘경남노회 통일 조정은 왜 결렬되었나?’ 그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한국교회 최초로 매카시즘 공격이었던 ‘고려신학과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와 불법 분리하는 노회 소집 통지문 등 문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특)별위원 처사에 대해 항의하고, 결론적 요구조건 일곱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문서는 제36회 총회(속회, 1951. 5. 25-29)에서 배포된 총회와 고려신학교와 경남(법통)노회와 얽힌 문제들에 대한 종합보고서 ‘경남노회 진상 보고와 진정서’(1951. 5. 25)이다. 이 문서는 46배판 활판 세로쓰기 인쇄로 13면에 달하는데, 경남노회 통일대책위원 이약신, 한상동, 박윤선, 박손혁, 이순필, 전성도, 엄주신, 심상동, 송상석 등 10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 문서는 총회에서 파송한 (특)별위원들이 삼분노회를 조직하고 제36회 총회에 5개의 노회가 총대를 파송했는데, 그 부당성을 항의하려는 목적이었다. 삼분노회가 불법이며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전권위원회의 결의와 같이 노회 분리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35회 총회에 경남(법통)노회에 총회 (특)별위원이 조직한 세 노회를 포함하여 중도파까지 다섯 노회가 총대를 파송했으나,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는 입장권을 받지 못하고 다른 노회들이 파송한 총대를 받고 입장하면서,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에서 단절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전권위원의 삼분노회의 조직은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단일 경남(법통)노회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김양선 교수는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교회의 주권을 의식적으로 교권주의자에게 바친 때문에 일어난 일대불상사들이었다. 한국교회 70년 역사상에 있어 이때처럼 교권의 행사된 때는 없었다”고 했고, 이 책은 그 때문에 판매금지를 당했다. 총회 후에 하나의 경남노회로 돌아갔고, 총회측 경남노회는 고신교회를 추방한 후 6년만인 1956년에 경남(부산), 마산, 진주노회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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