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9.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쇄신운동
- 작성자 : 나삼진
- 22-02-19 16:09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9.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쇄신운동
해방 후 한국교회의 제1의 과제는 교회재건 혹은 교회쇄신이었다. 교회재건은 두 가지 의미를 가졌는데, 하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설립으로 없어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각 노회를 기구적으로 복구하는 의미였고, 다른 하나는 무너진 신앙을 회복하고 참된 교회로 재건하자는 의미로 교회쇄신운동가들과 재건파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재건파는 범죄자들의 집단과 교류로 ‘동참죄’를 짖지 않는다는 과격성으로 장로교 총회에서 일찍 분리되었다.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해방 후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던 교회쇄신운동은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해 신앙적으로 실패하고 더럽혀졌으니, 이를 회개하여 마음을 새롭게 하고, 대한교회를 새롭게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이는 회개운동과 고려신학교를 통한 개혁주의 신학운동이었다. 이는 실패한 자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새로워지자는 것이었다.
해방 후 교회재건을 위한 첫 노력은 해방 한 달 후 9월 2일에 부산진교회에서 권남선, 김길창, 노진현, 심문태, 최재화 목사 등 경남노회 중요목회자들 20여 명이 모여 ‘신앙운동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에서 일제강점기의 범죄에 대한 자숙안도 가결되었는데,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옮겨 일단 교회를 사직할 것,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게 시무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등이었다.
이 모임에 유의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이들 속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당시에 경남교구장으로서 친일에 앞장섰던 김길창 목사도 있었다. 이들은 애당초 일제강점기의 친일행위와 신앙 훼절에 대해 진정한 참회와 교회쇄신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자숙 방안은 평양 감옥에서 나온 출옥성도들이 남하하기 전이었고, 자숙 정도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그들은 자숙안을 결의했지만, 진정한 친일청산과 교회쇄신을 기대하기보다, 노회의 기구적인 재건을 목적으로 하였고, 제안된 자숙안은 노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교묘히 폐기되고 말았다.
해방 후 한국교회의 새출발을 위해 친일부일 행위와 신앙훼절과 일제잔재 청산은 시대적 과업이었다. 실제로 1941년에 부임해 1945년까지 친일협력을 하며 초량교회를 목회하였던 김만일 목사는 교회를 사면했다. 그런 면에서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방안은 결코 과격한 것이 아니었다.
경남노회가 한국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쇄신운동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바로미터와 같았다. 제42회 총회보고서(1942)에 따르면 경남노회는 황해노회와 평양노회에 이어 세 번째 큰 규모를 가진 노회로, 부산이 중심이 되고 마산, 진주, 동래를 포함하는 경상남도 전역이었고, 지금의 부산, 경남, 울산을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경남지역은 초기 미국북장로교회와 호주장로교회 선교부가 함께 선교했지만, 선교지 분할정책 이후 호주장로교회 선교부 관할이 되었다. 당시 호주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는데,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목숨을 걸고 투쟁한 인물들 대부분이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주기철(웅천), 최상림 목사(동래), 이현속 장로(함안)가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한상동(부산), 주남선(거창), 손양원(함안), 손명복(의창), 최덕지(통영), 조수옥(하동) 등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투옥, 6년 이상 옥고를 치루었다.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쇄신운동은 한상동 목사가 주남선 목사, 박윤선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함으로 개혁주의 신학운동이 일어났고, 출옥성도들이 곳곳에서 부흥집회를 전개해 회개운동과 말씀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한국전쟁 직전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회개운동과 한국전쟁 기간에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경남노회가 기구적인 재건하면서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가 한상동 목사와 힘을 합쳐 고려신학교를 설립할 때 노회적인 지원이 따랐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그러한 쇄신운동에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몇 차례 갈등 끝에 김길창 목사 일파는 1949년 노회를 분리해 나갔다.
고려신학교 설립(1946)은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의 출발이었고, 이후 총회 안에서 한국교회 갈등의 태풍의 눈이 되었다. 제34회 총회(1948)는 고려신학교 입학 지원자 추천서 질의는 심사없이 정치부장 김관석 목사의 발언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해방 불과 1주 전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통리로 취임한 대표적인 친일목사로 1948년 WCC 창립 때 한국장로교회 대표였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장로교 총회 안에서 교회쇄신운동의 방해와 고려신학교의 단절은 친일부일 교권주의자들이 주도하였고, 중간파들은 부끄러운 침묵으로 협력했다. 중간파들은 그 쓴 열매를 고신측 단절 9년 후 연동측과 승동측의 분열로 맛보아야 했다.
김길창 목사는 주남선 목사(25회)나 한상동 목사(32회)보다 훨씬 선배(16회)로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해 일찍부터 경남노회 교권을 잡고 있었으며, 중앙 교권주의자들과 깊은 유대로 그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경남(법통)노회는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한결같이 성경의 가르침과 헌법에 호소했지만, 중앙교권과 지방교권의 강력한 연결고리는 문제 해결을 어렵게 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회개운동과 친일청산의 실패로 한국교회 신앙 정기가 흐려졌다.
경남지방 교회쇄신운동의 중심에는 한상동 목사가 있었다. 서울장신대 총장을 지낸 문성모 박사는 교회쇄신운동의 중심이었던 한상동 목사의 설교에 대해 “교회 안에서 개혁을 외쳤고, 타협과 일치를 도모했으며, 보수신앙의 기초를 세웠다”고 평가하고, 그가 “순수한 열정과 헌신의 사람이었으나 한국교회를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가 순교했더라면 주기철, 손양원과 함께 한국교회 3대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순교자의 길보다 더 혹독한 순교 이상의 길을 걸으라고 명령하셨다”고 기술한다. 결론적으로 “성경대로 설교하고 성경만을 외치던 한상동의 보수신학에 한국교회의 살 길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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