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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6. 고려신학교 개교


고신역사 70년 역사 산책

6. 고려신학교 개교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가 역사적인 개교를 했다. 해방 후 새로운 대한교회를 위해 개혁주의 신학교육이 절실할 때였지만, 당시 한국장로교회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조선신학교밖에 없었다.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에 따라 이후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휴교에 들어갔고,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어 일제와 협력하는 가운데 신학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선교사들이 귀임하지 않았던 때라 신학의 공백도 있었다. 당시 사회지도층의 학력이 높지 않았던 때에 교육을 많이 받았던 목사와 장로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했는데, 장로교 함태영 목사가 부통령이 되었고, 감리교 이윤영, 이규갑 목사 등은 제헌의회 국회의원이 되었다. 기독교인사들이 많았던 관계로 이만열 교수는 이승만 정권을 ‘기독교적 정권’이라 했다.

1942년 제31회 총회를 끝으로 모이지 못했던 총회를 대신하여 제1회 남부대회(1946. 6, 승동교회)가 모여 조선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인가하였다. 4월에 박윤선 목사를 만나 신학교 설립에 합의하였던 한상동 목사는 긴급히 주남선 목사 등과 함께 기성회를 조직했다. 주남선 목사는 거창지방 31운동을 주도하고 그 시기에 독립군 군자금 모금 관계로 투옥된 바 있었던 애국지사였다. 그는 해방 후 제헌의회 선거 때 거창지방에서 지역유지들이 하나가 되어 국회의원 출마를 강력하게 요청받았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을 정도로 거창지역과 경남부산교계에서 신망받던 인물이었다. 뜻을 같이 한 손양원 목사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설립자들은 개교를 준비하면서 신학 예비과정으로 두 달 동안 진해에서 신학강좌를 개최하였다.

고려신학교는 7월 9일 경남노회 임시노회에서 신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9월 20일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설립한 부산진 일신여학교 교실을 빌어 개교하였다. 입학식에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으로 300만 구령운동을 전개하였던 김치선 박사가 ‘신학과 신조’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미국정통장로교회 출신 주한군목 벧졸트와 부산진교회 최재화 목사의 축사가 있었다. 개교 당시 학제는 본과 3년, 예과 2년, 별과 3년, 여교역자과 3년이었다. 개교 당시 입학자는 53명이었다(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한부선 선교사가 입국해 서울에 도착한 첫날, 서울 벧졸트 군목의 집에서 한상동 목사를 만났을 때 ‘새 교회를 출범시키기를 원하지 않고 옛 교회를 정화하기를 원하며’, ‘칼빈주의 신학교가 이 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긴다’고 했으며, ‘신학교 교수직 제의를 받았다’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했다(1946. 10. 31). 진해 신학강좌를 거쳐 고려신학교에 입학한 이인재, 조수완, 황철도(제1회), 김응도, 남영환(제2회), 박인순, 손명복, 윤봉기(제3회) 등이 초기 졸업생이 되었다. 이들은 평양 장로회신학교나 일본이나 만주 봉천신학교 등에서 공부하였던 학점을 인정받아 개교 1년만에 첫 졸업생 3명을 배출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가 ‘돈 없이 집없이 인물없이’ 개교했다. 고려신학교는 설립 초기 일신여학교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둘째학기가 시작되던 3월 5일에 초량교회 유치원에 한 달 동안 수업하다가, 광복동에 새교사를 마련하여 이전해 ‘보따리 신학교’라 별명이 붙었다. 설립자들은 한국교회 쇄신의 열의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며 이 운동을 시작했다. 학생들도 목숨을 걸고 공부했는데, 영양실조로 기숙사에서 굶어죽은 학생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개교한 고려신학교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몇 가지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먼저, 설립자들과 교수진의 전적인 헌신으로, 바른 신학에 대한 열정과 후원이 있었다. 교수가 많지 않았던 시절 교장서리 박윤선 목사가 대부분의 강의를 맡아 가르쳤고, 한 달 뒤 한부선 선교사가 입국해 교수로 합류했으며, 한상동, 한명동, 박손혁 등도 강사로 가르쳤다. 초기에는 전학년 수업제로 운영해 교수가 많지 않았을 때 효율적인 측면이 있었고, 신학교의 초기 분위기는 박윤선과 여러 교수들의 열변을 토하는 강의에, 학생들은 강력한 기도운동으로 영적인 활력을 유지하였다. 신학교가 날마다 부흥회와 같았고, 뜨겁고도 신학적인 깊이도 있었다.

둘째, 고려신학교는 초기 교회와 영적인 일체감이 있었다. 출옥성도들과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교회는 소수였고,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영남에 치중되어 있었다. 제36회 총회(1951)에서 고려신학교를 거부하고 총회의 압박이 가해지면서 1951년부터는 기존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신설교회가 많았기 때문에 교회마다 자립도 바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신학교 설립자와 교수진, 학생들과 교회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시대적 과업에 충실하고자 했다. 전국교회가 예배마다, 또 새벽마다 고려신학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영적 자산이 풍성하였다.

셋째, 신학생들의 공동생활은 영적인 일체감을 가져다 주었고, 광복동 교사 시절부터 ‘고신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신학교는 예과 2년 본과 3년의 학제였지만, 강의실과 강당, 식당, 생활관이 거의 하나였던 시기였다. 그러한 분위기는 선후배들이 함께 교회쇄신운동의 동지로서 영적 일체감이 형성되었고, 해방 후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

넷째, 고려신학교의 문서운동이 학교의 유지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신학교는 학교가 안정되면서 1948년 ‘파수군’을 창간했고, 네 차례 ‘진리운동’이라는 소책자를 간행하였다. 한부선 선교사는 교회쇄신운동을 위해 출판의 중요성을 알고, 인쇄용지를 수입하는 등 상당한 협력을 했다.

다섯째, 고려신학교가 정착되는 일에 한부선, 함일돈, 마두원, 최의손 등 선교사들이 협력하였다. 고려신학교는 미국정통장로교회와 독립선교부의 지지와 협력을 받았고, 미국개혁교회의 지원이 있어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국제적인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다. 제1회 졸업식 소식이 한달 후 미국정통장로교 격주간 정기간행물 Presbyterian Guardian 8월호에 실린 것도 그러한 호흡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개혁주의 교회의 국제적인 연대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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