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Translation

목회자료실

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30. 환원, 고신교회가 입은 큰 손실과 새로운 출발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30. 환원, 고신교회가 입은 큰 손실과 새로운 출발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했으나 ‘단번에 이루어진 밀월의 약속, 과속으로 치달은 합동, 영속성을 결여한 합동’(허순길)은 오래 갈 수 없었다. 1962년 10월 한상동 목사가 총회신학교 부산분교(고려신학교) 경건회를 인도한 후 복교 선언과 학생들의 지지로 고려신학교가 복교되었다. 합동총회는 고려신학교 졸업생들의 강도사 고시 응시 자격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고신측 환원의 분위기가 가속화되었다.

그해 8월에 각 노회가 환원하고, 고신측은 1963년 9월 17일부터 사흘간 부산남교회에서 환원총회를 갖고, 회장 송상석, 부회장 황철도 목사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한상동, 송상석, 황철도 목사의 사과가 있었고, ‘총회 합동으로 피차간 상처를 받게 한 도의적 책임으로 총회산하 목사 장로는 일 주간(9. 23-29) 자숙하기로’ 가결했다.

오늘의 ‘합동측’은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동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어떤 학자는 칼빈의 교회론을 근거로 교회 분열의 부당성을 논한 바 있지만, 교단이 신학의 차이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마저도 독일 귀족들의 이익이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영국 성공회의 경우 국왕의 교회수장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장로교단만 200개 이상으로 분열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동안 지방색, 교권욕, 그리고 ‘우리끼리’ 의식과 욕망이 너울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1970년대 이후 교회성장기에 교권욕으로 인한 핵분열도, 개별교회의 생존전략으로 대통합을 이룬 것도, 이후 교단적인 통제가 없어 개교회주의가 발흥한 것도, 그 집안에서 주로 일어났다. 교계 연합운동에서의 과도한 지분 요구, 교권의 전횡, 교회 세습, 목회자의 윤리적인 문제 등이 그 집안에서 가장 심하였다. 인타깝게도 최근 20년 동안 한국교회에 온갖 문제를 노출하여 왔던 것도 그 집안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제7회(1957) 총회에서 경기노회 보류파가 행정을 보류함으로써 교단을 떠났고, 고신측이 합동측에서 환원한 후 이들은 합동측에 합류하였다. 고신측이 환원하였을 때는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지키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신교회가 합동측에서 환원하면서 입은 손실은 다음과 같이 심대하였다. 첫째, 승동측과의 합동은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주창하던 회개가 중단되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영적인 지분이 합동측과 나누는 결과를 가져왔다. 합동시에 고신교회의 역사를 이원적 사실로 기록하였을 뿐, 신사참배 결의의 부당성이나 이에 따른 공적인 회개, 고신측의 단절에 대한 유감 표명도 없었고, 고신측은 이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합동으로 신사참배 회개운동이 중단되었다.

둘째, 고신교회는 환원 과정에서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을 잃었다. 1960년 합동 당시 590교회 중 445교회만 환원에 동참하였고, 경기노회 보류측을 합하면 모두 177교회가 사라져 교세의 30%를 상실했다. 이상근, 김창인, 박희천, 정문호, 최훈, 이학인, 이용규, 정봉조, 박희천, 최기채, 채은수, 황보연준, 이용규 등 이북출신의 중견 지도자들을 다수 잃었다. 고신측은 인력 유출과 함께 이러한 이북출신 목회자들의 이탈로 영남중심 교단으로 고착화되고 말았다.

셋째, 고신신학의 바탕이었고 학문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었던 박윤선과 함께 김진홍, 이상근, 안용준 등 교수들도 잃었다. 고신측은 초기의 영적인 분위기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였다.

넷째, 고신교회가 유일하게 고신교회와의 관계를 갖고 있던 미국 정통 장로교회(OPC) 선교부는 환원이 절차상 문제점이 있다고 보아, 이후 고신측과 합동측에 함께 자매관계를 유지했다.

다섯째,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 기관지로 대중전달의 수단이었던 ‘파수군’을 잃었다. 편집인으로 있었던 안용준 목사가 합동측에 잔류하면서 잡지도 합동측에 남았다가, 기독신보(현 기독신문) 창간의 밑거름이 되고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여섯째, 고신교회가 2년 동안 준비한 새찬송가 편집이 거의 마무리된 상태에서 양 교단의 합동기념으로 새찬송가를 발행하였지만, 환원시에 이를 두고 나와야 했다.

제13회 환원 총회 이후 고신교회는 몇 가지 흐름을 보이고 있다. 먼저, 헌법과 교리적 표준이 채택되었다. 이근삼 교수가 교리문답을 번역하였고, 제14회 총회에서 헌법 개정 작업을 시작하여 제15회 총회의 결의와 수의를 거쳐 공포했고, 제16회 총회에서 표준문서를 3개년 계획으로 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몇 년의 유예기간을 두었지만 목사 70세 정년제를 도입했다.

둘째, 교단 헌법을 정비하였는데, 행정적으로 치밀한 오병세 교수가 중심이 되어 이끌었다. 헌법의 정비는 소수 지도자의 영적 권위보다 법적이고 합리적인 치리를 의미했다.

셋째, 합동에서 환원한 후 1960년대에 고신교회에서 고등교육의 진전이 있었다. 1968년 복음병원 부속 간호학교가 설립되었고, 전문대학을 거쳐 고신대학교 간호대학으로 편입되었다. 넷째, 교회교육 분야도 큰 진전이 있었다. 제14회 총회(1964)에서 교육과정심의위원회를 구성해 오병세 위원장과 이근삼, 허순길, 양승달, 최해일, 윤종하, 이만열, 이중재 등이 함께했다. 이근삼 교수가 준비한 ‘교단 교육이념과 목적’을 심의하여, 제15회 총회에 보고해 공식문서로 채택되었다. ‘교단교육의 이념과 목적’은 고신교회의 신앙고백적인 문서로 평가받는데, 이를 기초로 한국교회 최초의 계단공과 ‘생명의 양식’ 교육과정(6년 과정)을 편찬했다.

합동과 환원으로 고신교회는 심대한 내상을 입어 합동시 590교회는 무려 17년이나 걸려 1977년에서야 회복되었고, 한국교회 성장기를 허송하고 말았다. 아름다운 연합이라는 미명하에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 지도자의 마음에 드리운 영적 자만,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여가 가져온 열매는 참 참혹하였다. 합동과 환원으로 승동측은 위기에서 벗어나고, 고신측은 큰 손실을 보았다. 합동측의 공식 학생운동이 된 SFC가 고신측의 환원 후에도 존재하다가 1973년에 SCE로 개칭하였다.


*링크를 연결하면 관련 사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교회역사 이야기

NO 제목 글쓴이 날짜
101 [고신역사 아카이브] 31. '동방박사 세 사람':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교수 나삼진 06-28
100 [고신역사 아카이브] 30. 환원, 고신교회가 입은 큰 손실과 새로운 출발 나삼진 06-22
99 [고신역사 아카이브] 29. 고려신학교 복교와 그 전후사정 나삼진 06-14
98 [고신역사 아카이브] 28.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 나삼진 06-10
97 [고신역사 아카이브] 27. 박윤선 교장과 송상석 목사의 법정 소송 논쟁 나삼진 06-01
96 [고신역사 아카이브] 26. 경기노회 보류파와 교계의 지방색(1957) 나삼진 05-25
95 [고신역사 아카이브] 25. 총노회의 총회 개편, 그 무렵의 고신교회 나삼진 05-17
94 [고신역사 아카이브] 24. 흔들리는 박윤선 고려신학교 교장 나삼진 05-10
93 [고신역사 아카이브] 23. 고신교회와 동역했던 선교사들 나삼진 05-03
92 [고신역사 아카이브] 22. 총회 승격 기념 김영진 선교사 대만 파송 나삼진 04-19
91 [고신역사 아카이브] 21. 교회쇄신운동과 여성도들의 헌신 나삼진 04-13
90 [고신역사 아카이브] 20. 비저너리 한명동 목사와 기독교 대학 ‘칼빈학원’의 꿈 나삼진 04-06
89 [고신역사 아카이브] 19. 고려신학교, 송도 교정의 조성 나삼진 03-30
88 [고신역사 아카이브] 18. 교회쇄신운동의 확산과 각 지역의 중심교회들 나삼진 03-30
87 [고신역사 아카이브] 17. 교회쇄신운동의 나팔수 ‘파수군’, ‘기독교보’, ‘진리운동’ 나삼진 03-21
86 [한국선교사 열전] 1912년주 조선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보고 Henry Park 03-21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