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28.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
- 작성자 : 나삼진
- 22-06-10 15:36
고신역사 70년 역사 산책
28.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
박윤선 교장이 14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고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하고 주석을 출판하였던 고려신학교를 떠난 것은 고신교회에 큰 충격이었다. 한상동 목사가 말했듯이 고려신학교는 ‘사람 없이 돈 없이 시설 없이’ 개교하였고, 그 첫 10년은 안용준 목사의 노래 같이 高紳은 ‘孤信’, 나아가 ‘苦辛’ 그 자체였다. 교수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도 기쁨으로 가르쳤고, 학생들은 굶어가며 배우기를 힘썼고, 심지어 영양실조로 기숙사에서 죽는 학생이 나올 정도였다.
1954년 고려신학교 송도 교사를 조성할 때는 박윤선 교장과 교수들이 앞장서고, 학생들도 노동을 하면서 기쁨으로 건축에 협력했다. 경남 일원과 대구에서까지 성도들이 와서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 잠을 자며 근로봉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윤선 교장이 요한계시록를 비롯한 성경 주석을 발간할 때 고신교회 성도들은 회원으로 가입, 사전에 책값을 입금하며 저자를 격려하고 주석 출판을 기뻐했다.
그런데 고려신학교가 개혁운동 10주년에 송도 교사가 조성되고, 총노회가 총회로 개편되면서 초기 ‘고난의 떡’을 함께 먹던 때와는 달랐다. 박윤선 교장의 170여 명 제자들은 개척교회들이 알차게 성장하고 있었고, 학문적으로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가 되었는데, 신학교의 사정은 여전히 어려워 많지 않은 월급마저 제때에 지급되지 못했다. 사실 신학교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훗날 총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1960년대 후반까지 교수들의 월급이 2,3개월씩 밀리던 총신의 ‘보릿고개’가 있었다.
박윤선 교장이 재혼 후 부인 이화주 여사 사이에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가정사가 점차 복잡해졌고, 가정적으로 이전과 같이 인내심이 깊지 못했다. 소수의 이북 출신 목회자들과 다수를 차지하던 경남 출신 목회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긴장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 무렵 박윤선 교장과 송상석 목사와의 극렬한 소송 논쟁이 전개되었고,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박사 학위가 무산되고 귀국한 후 얼마지 않아서 1960년 7월 주일성수 문제가 발생되었고, 박윤선 교장은 이사회로부터 유감 표명을 요구받았다. 사실 그 일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양심에 꺼리낄 일이 아니라 보았던 박윤선 교장은 사과를 거절하고 깨끗하게 신학교를 떠났다.
박윤선 교장이 떠나고, 부교장 한부선 선교사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가면서 신학교는 황량해졌고, 신학교육에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박윤선 교장이 물러난 후 고려신학교 당국에서는 유학중인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목사에게 귀국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박사 논문이 진행중이라 귀국할 수도 없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총회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3천만환 사건으로 연동측과 승동측으로 분리되었고, 선교부들이 연동측을 지지하면서 많은 기독교 학교들과 선교부가 조성한 재산들도 연동측으로 넘어갔다.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4대 장로교회 선교부가 지원하는 신학교육을 원해 서울로 갔지만, 그의 계획은 10년 만에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박형룡 교장이 교계의 신앙적, 신학적 이질성을 고려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큰 난관에 처했던 박형룡 박사와 승동측 지도부는 박윤선 교장의 이탈로 적지 않은 난관에 처했던 고신측에 만남을 제의했고, 서울에서 회의가 있던 기회에 회동이 이루어졌다. 남영환 목사는 “그 모임에서 박형룡 박사는 자신이 1948년 한 목사와 헤어진 것을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라며,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위해 새로이 출발하자고 간곡히 제의했다”고 했다. 그때는 총회를 불과 두 달 앞둔 때였다.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은 이렇게 서로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감성적인 것이었다. 합동에 대한 논의는 급물살을 타 고신측은 1960년 9월 총회에서 송상석 목사가 총회장과 임원을 선출하고 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정회하였고, 양측 대표단은 합동을 추진했다. 연구위원회는 불과 두 달의 준비 끝에 12월 13일에 합동총회를 개최하였다.
합동총회는 고승모 승동측 총회장의 사회로 박형룡 박사가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고, 고신측 총회장 송상석 목사가 축도하였다. 회무처리에서 양 축 대표로 구성된 합동추진위원회가 준비한 ‘취지 및 선서문’을 채택하였고, 한상동 목사를 회장에 선출하였다. 총회에는 많은 고신교회 성도들도 방청해 대학생 손봉호도 참관했는데, 한상동 목사가 총회장으로 추대될 때 극구 사양했던 모습을 보였다고 증언했다. 총회에서는 다음날 정통장로교 한부선, 성경장로교 세계선교부 현요한, 독립선교부 마두원, 생명의 말씀사 갈필도 선교사의 축사가 있었고, 국일관에서 양측 총대 환영회가 있었다.
합동총회는 고신측이 ‘1949년 이래 경건생활에 치중하여 정통신학교육에 힘쓴 것과 예장측 총회가 세속주의를 배격하기 위하여 WCC를 탈퇴하고 WCC노선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한 결의를 인정한다’고 했지만, 정작 신사참배의 범과에 대한 고백이나 회개운동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단지 고신측 경남(법통)노회를 단죄했던 제36회 총회 결의사항만 취소했다.
합동총회는 고신측에서 송상석 목사가 중심이 되어 2년 이상 편찬 작업을 하였던 ‘새찬송가’를 합동 기념으로 발행했고, 송상석 목사가 주도해 ‘총회 설립 50년 약사’를 편찬했는데(1962), 고신교회 10회기 총회사는 이원적 사실로 병기했다. 합동 이듬해에 고려신학교 교수 요원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던 홍반식과 오병세가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총회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오병세는 서울에서, 홍반식은 부산에서 가르쳤고, 이근삼은 그 다음 해 귀국 해 칼빈학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합동에 대해 남영환 목사는 “고신교단도 박윤선 목사의 사임은 합동에 불을 붙인 셈이나, 고신도 궁지에 몰린 나머지 성급히 합동한 것은 실로 큰 실책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뒷날의 얘기다”라 했다. 개인이나 교회나 어려울 때일수록 일의 처리를 신중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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