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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26. 경기노회 보류파와 교계의 지방색(1957)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26. 경기노회 보류파와 교계의 지방색(1957)


사람은 시대의 아들이다.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그 문화를 뛰어넘어 생존하기 어렵다. 이는 신앙세계에서도 더러 경험하는 일이다. 해방 후 고신교회는 이런 면에서 고려신학교와 SFC를 통해 많은 인재를 양성했으나 이들을 잘 관리하는 일에 실패했다. 경남 출신의 단일한 지방색이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한국장로교회가 해방 전 단일 총회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의 컬러가 지역적인 차이와 분리를 가져왔다.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고신측이 추방되었고(1951), 김재준 박사의 신학 문제로 캐나다장로교회 선교부 영향권이었던 기장측이 분리되었으며(1953), 1959년에는 WCC문제 등으로 연동측과 승동측이 분리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한국장로교회의 분리가 가속화되었고, 교계의 지방색이나 교권에 대한 탐욕으로 지금은 200여 이상의 장로교단이 형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분리나 합병은 꼭 교리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은 지방 영주들의 이해관계가 깊이 관계되었고, 네덜란드가 개혁교회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자유정신의 고양이 중요한 요인중 하나였다.

한국교회의 경우 교회 분리는 교리적인 문제보다 다른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했던 이북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평양 출신들이 ‘평양교회’를 설립, 전쟁이 끝난 후 17년이던 1970년까지 그 이름으로 존재했다. 해방 후 공산주의를 피해 남하했던 남하한 성도들 가운데 평안도 출신들은 영락교회에, 함경도 출신은 경동교회로 모여들었던 것도 비슷한 일이다.

고신교회가 총회에서 추방된 1년 후 총노회를 발회한 것이 1952년인데, 1956년에는 진리운동 10주년을 맞아 부흥회를 갖고, 총회로 승격했다. 박윤선 교장은 그 총회 벽두에 탈퇴를 언급했다가 취소했고, 회무에 들어가 예배당 쟁탈 문제, 교회 질서 문제, 기독교보 문제, 신학교에 대한 재정 문제 등 네 가지 잘못의 시정을 요구했다. 경기노회는 박윤선 교장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는데, 총회의 처사에 대해 항의하는 차원에서 총대들이 퇴장하였고, 박윤선 교장도 이듬해 2월 교장직을 사면하고, 서울로 올라가 개혁신학원을 설립했다.

경기노회는 제7회 총회(1957)에 총대를 파송했으나 소송문제에 대해 진전이 없자, 총회 후 임시노회에서 ‘예배당 쟁탈전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회와의 행정 관계를 보류하기로 결의했다. 고신교회 역사에서 이들을 가리켜 ‘경기노회 보류파’라고 한다. 대부분 이북 출신이었던 이들은 부산 피난시절 고신교회에 합류하였다가 서울 수복 후 서울에서 교회를 설립, 경기노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이후 각자 자신들의 교회에서 소송과 연루되었던 것을 보면 경기노회 보류파는 소송 문제와 지방색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당시 총회 조직에는 경기노회와 전라노회 등 교세가 약한 노회를 지원하는 지방위원이 있었는데, 노회가 임시노회를 소집한다는 소식에 지방위원들이 참석하였으나, 관례와 달리 언권회원으로 받지 않았고, 발언권도 주지 않고 행정 보류를 결의하였다. 지방위원은 한 해 동안 여러 시도를 했지만, 대화가 난망하였던지 제8회 총회(1958)에 보류파는 참여하지 않았고, 총회의 지지자들이 노회를 구성하여 총대를 파송하여 노회가 분리되었다.

당시 지방위원들의 처사는 고신교회가 총회에서 단절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박윤선 교장과 이인재 목사 등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당시 경기노회 보류파와 지방위원들이 좀 더 인내를 가지고 대화했어야 했고, 고신교회는 소송 문제에 대한 결론을 속히 내어야 했다. 아쉬운 일이다.

경기노회 보류파의 중심인물은 고흥봉 목사(남산), 전칠홍(서울중앙), 이학인(명동), 강진선(원남), 이병규(명륜), 김창인·최훈(충현) 목사 등이었다. 고흥봉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주남선, 한상동 목사 등과 함께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지루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분이었다. 전칠홍 목사는 서울중앙교회를 설립해 경기노회장으로 있으며 보류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이학인 목사는 부민교회를 목회하다 상경하여 명동교회를 설립하였다. 부산 동일교회와 영주동교회를 개척했던 김창인 전도사와 최훈 목사는 서울에 상경, 충현교회(당시, 서울동일교회)를 설립였는데, 이들은 합동측 총회장(김창인 1970, 최훈 1984)을 역임하며 한국교회 지도자가 되었다. 이병규 목사도 훗날 계신총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당시 경기노회는 서울, 경기, 충남, 충북, 강원도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고, 전쟁 후 서울 수복으로 인해 속속 개척교회가 설립되었다. 경기노회 47개 교회 가운데 26교회가 보류파로서 소송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면서 행정 보류에 동참하였다. 이북 출신 목회자 가운데 오종덕(고려고등성경학교), 안광현(남천) 목사 등은 끝까지 고신교회에 남았고, 평안도 출신 명신익(흥천) 목사는 훗날 총회신학교 교장을 지낸 형 명신홍 목사가 합동측의 중심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신교회와 함께했다.

경기노회 보류파의 이탈은 경남노회가 출발이 된 고신교회의 전국화 기회를 잃게 했고, 영남편중성이 심해져 고신교회의 성장을 크게 방해했다. 역사에서 가정이 무의미하지만, 그 시기에 고신교회가 소송 문제에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또 박윤선 목사와 경기노회 보류파도 뜻을 함께 했다면 고신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개혁주의 교회로 큰 전진을 이루었을 것이다. 경기노회 보류파는 이후 행정 보류 상태를 유지하다가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할 때도 합류하지 않았고, 고신측이 환원한 후 합동측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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