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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23. 고신교회와 동역했던 선교사들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23. 고신교회와 동역하였던 선교사들

어느 나라 교회나 그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정치적 영향을 받고 있는데,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미국 남·북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선교로 시작되었는데, 1907년 독노회 설립과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때 단일장로교회로 조직되었다.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이후 캐나다장로교회는 기장측과, 다른 세 선교부는 통합측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 고신교회는 처음 외국교회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서로 협력하였을까?

한국에 선교를 하였던 4대장로교회와 미국감리교회 선교부는 효과적인 선교를 의도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시행할 때 부산·경남지방은 호주장로교회 선교 관할 구역이었다.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 부산·경남지역 출신의 고신교회 초기 지도자들은 호주선교사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사역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할 때도 이들 선교사들의 지지와 협력과 일부 재정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호주장로교회가 총회측 입장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계가 단절되었다.

고신교회 지도자들이 고려신학교 설립과 교회쇄신운동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측과 갈등하고 있을 때, 한부선 선교사(Bruce F. Hunt)가 첫 협력자였다. 그는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이었고 미국북장로교회 파송선교사였으나, 메이첸 박사가 프린스톤신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였을 때 그를 지지하였고, 안식년으로 미국을 방문하면서 정통장로교회 총회 창립 때 창립회원이 되었으며, 이후 만주로 선교지를 변경해 사역하였다.

그는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결의에 강력하게 항거하였고, 만주에서 선교하면서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언약문을 작성하였고, 구금과 석방을 반복하다가 체포되었고, 포로교환 형식으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미국에서도 한국교회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해방 후 다른 선교사들보다 비교적 빠른 1946년 10월에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한부선 선교사는 고려신학교 개교 한달 즈음에 입국한 다음날 미군목 벧졸트의 집에서 한상동 목사의 방문을 받고 고려신학교와 협력하기로 했다. 해방 후 고려신학교 설립과 교회쇄신운동으로 총회측과 갈등이 시작되면서 한부선, 함일돈, 마두원, 최의손 등 고려신학교에 협력하는 선교사들이 메이첸 교수를 따르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 미국 정통장로교회와 성경장로교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을 ‘메이첸파 선교사들’이라 낙인찍고, 교류를 금지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공식 선교사회원들을 심사도 없이 교류 금지 조처를 단행하였다.

고려신학교 설립 초기 그는 신학교수, 교회 돌봄, 개척전도, 헌금, 학생들의 멘토, 도서 마련 등에서 학교와 학생들은 물론 고신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과 환원(1963) 이후 절차적 정당성에 의문으로 합동측에 잔류하였고, 고신측과 합동측 양쪽과 관계를 가졌지만 학교에서는 교수직을 떠났고, 훗날에는 강사로 가르쳤다.

그는 고려신학교를 떠나서도 부산을 중심으로 평생 선교에 힘쓰다가 정년을 3년이나 넘겨 1975년 은퇴하였다. 고려신학대학의 주선으로 부산명예시민증을 받았고, 고신교회가 범교단적인 환송회를 열었을 때 필자는 전국SFC를 대표해 기념품을 증정하였다.

고신교회 초기에는 미국개혁교회(CRC)와도 깊은 관계를 가졌다. 해방 후 첫 미국 유학생이었던 전영창 선생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5천 달러를 지원받고 매월 500달러 지원을 약속받아 귀국했고, 복음병원 설립 후 매월 500달러를 보내왔다. 복음병원 초기에 환자와 자원봉사자로, 직원으로 일하다가 행정부장을 지냈던 정기상 장로는 월 500달러로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기본 4과에 의사와 직원 등 32명의 월급과 운영비에 해당되었다고 했다. CRC의 후원 정책에 한국의 국민소득이 300달러로 높아짐에 따라 원조는 5년만에 중단되었다.

고신교회 초기에 미국개혁교회(CRC)와 교류했는데, 사절로 온 보로니카 목사는 제3회 총노회 개회예배 설교를 하였고, 총노회가 선교사 파송 요청을 했으나 선교사를 파송하지는 않고 송도 교사 마련에 상당한 재정을 지원했다. 제4회와 제5회 총노회 때도 사절을 파송하였다.

고신교회 초기에 함일돈(Floyd. E. Hamilton), 마두원(Dwight R. Malsbury), 최의손(William H. Chisholm) 선교사 등은 대표적인 선교동역자들이었다. 함일돈은 ‘기독교변증론’(1927)을 비롯한 다수의 책을 저술한 변증신학자로 고려신학교 교수로 가르쳤고, 마두원은 한국교회 최초 음악선교사로 한동일, 백건우 등을 세계적인 연주자로 길러내었다. 강계 미동병원장을 역임했던 최의손은 복음병원을 도와 경남구제회 국제 회계로 봉사했고, 이들은 초기 SFC수양회의 인기있던 강사들이었다. 또 최의손, 마두원은 고려신학교 송도교사를 조성할 때 주한미군과 연결, 토목공사를 도왔고, 최의손은 한국전쟁으로 남하한 장기려 박사가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한상동 목사의 요청으로 구명에 앞장섰다.

고려신학교 교수 설립자 한상동, 교장 박윤선, 교감 한부선, 교수 함일돈과 강사 박손혁, 오종덕, 최의손, 마두원은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반대하면서 1949년 11월 ICCC의 기독교아세아대회에 참가하는 최의손 선교사를 통해 ‘국제기독교연합회에 드림’이라는 서한을 보내었지만, ICCC의 극단적인 입장으로 고신교회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가 발회된 후 국제기독교연합회(ICCC)가 총회에 초청장을 보내와 제3회 총노회(1954)에서는 한상동, 박윤선, 이약신, 박손혁 4인을 업저브 자격으로 파송을 결의했고, 이 기간에 박윤선, 한상동 목사가 훼이스신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ICCC를 주도하던 메킨타이어는 고신교회에 공식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고신교회는 그의 지나친 분리주의 경향으로 비공식적인 관계로 교류하였다. 마두원 선교사 등은 1962년 ICCC를 성경장로회 창립에 가담하면서 고신교회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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