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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17. 교회쇄신운동의 나팔수 ‘파수군’, ‘기독교보’, ‘진리운동’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17. 교회쇄신운동의 나팔수 ‘파수군’, ‘기독교보’, ‘진리운동’

고신교회는 초기부터 잡지나 신문 등 독자적인 언론을 갖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언론은 개혁운동 혹은 교회쇄신운동의 나팔수가 될 수 있고, 더 가열차게 전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48년 12월에 ‘파수군’이, 1956년 6월에 ‘기독교보’가 창간되었고, 1950년에 ‘진리운동’ 시리즈가 네 권 발행되었다. 고신교회의 언론의 역사는 이렇게 깊고 넓다.

1946년 9월 20일 ‘돈 없이, 집 없이, 인물 없이’ 고려신학교를 시작한 한상동 목사는 이사장으로서 신학교의 운영의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박윤선 교수는 월급을 충분히, 그리고 제때 받지 못하면서도 가르치며 주석을 출판하고, 고신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는 일에 모든 힘을 다 쏟았다. 한부선 선교사는 정통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생활비를 받고 무보수로 가르쳤으며, 교회에서 설교나 집회를 인도하고 받은 사례도 모두 신학교에 입금시키며 헌신했다. 한명동 목사는 안정된 교회를 물려주고 부산남교회를 개척하며 행정과 기숙사 관리를 맡았다.

고려신학교는 초기에 운영이 쉽지 않았는데, 백 명이나 되는 신학생들이 한 교실, 한 기숙사, 한 강당에서 공부해야 했다. 경남노회 안에서도 신학교 인가와 취소가 반복이었고, 총회측과의 갈등도 무려 6년이나 계속되었다. 고려신학교가 개교 2년만에 광복동 교사에 자리잡고 안정되면서 교지 ‘파수군’을 창간했다. 창간호는 학우회와 동창회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는데, 정상적으로 자라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제2호는 1949년 4월에, 1950년 3월에 발간한 제3호 이후 정상화되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 제7호는 다시 1년 후인 1951년 7월에야 발간했다. 초기의 편집후기에는 여러 차례 늦게 내어 미안한 마음을 표시할 정도였다. 초기에는 30면 남짓한 잡지였지만, 출판이 정상화되면서 50면 수준을 유지하였다.

‘파수군’이 창간된 때는 총회측과 연결된 교권주의자들이 고려신학교를 비난하고 불법노회를 분리시켜 나간 뒤였다. 교회들이 가난했기도 하지만, 전쟁중이어서 물자 공급이 쉽지 않았고, 물가도 천정부지였기 때문에 잡지의 정상적인 발행이 여의치 않았다. 이 시기에 장석인 교수의 아들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의 전신 ‘사상’을 피난시절에 부산에서 간행하였다.

고려신학교가 발행한 신학지 ‘파수군’은 교회쇄신운동의 나팔수와 같았다. 잡지에는 설교, 신학, 강해, 소식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이 포함되었다. 박윤선 교장은 자신의 수업이나 강의를 따라 주제와 관계없이 수시로 다양한 글을 발표하였는데, 성경 주석이나 성경연구, 설교, 논설 등 보통 세 가지 글을 발표하였다. 1953년 1월호에는 권두언, 논문, 시편 주석, 칼빈주의 연재, 졸업식 훈사 ‘백훈’, 설교 일부를 시로 다듬은 것까지 여섯 편이나 기고했다. ‘파수군’은 한 때 2천 부씩 발행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고려파교회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들의 가정은 ‘파수군’을 구독했다.

‘진리운동’ 시리즈는 ‘정통신학에서 본 빨트와 뿌른너의 위기신학’,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어디로 가나?’, ‘우리의 신앙’, ‘신앙노선과 생활원리’ 등 네 권(1950)이며, 별도로 한상동 주남선 명의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1949)과 ‘우리의 신앙노선’(1954)이 출판되었다.

박윤선 교장의 ‘파수군’과 ‘진리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운동 당시에 루터의 삼대문서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 세 책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에 힘입어 종교개혁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지도자들은 문서운동의 중요성을 알고, 잘 활용해 ‘파수군’은 교회쇄신운동의 나팔수가 되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교회쇄신운동에서 문서운동의 필요성을 알고 적극적으로 협력했는데, 인쇄용지가 비싸고 귀하여 미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심혈을 쏟았다.

‘파수군’과 ‘진리운동’의 영향력은 1956년 ‘기독교보’를 창간하면서 교단 지도부 사이에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고신교회들은 대부분 영남지역의 신생교회라 재정적 여유가 없어, 고려신학교와 칼빈대학 운영, ‘파수군’과 ‘기독교보’ 발행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1955년 4월 제4회 총노회에서 출판위원회를 신설하고, 송상석 목사가 위원장으로서 기독교보 창간 계획을 포함한 사업계획을 보고했지만, 별지가 없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총회 후 준비를 거쳐 10월에 기독교보 창간준비위원회가 발족되고, 1955년 6월 8일 창간된 ‘기독교보’는 교계 소식은 물론 신학과 교회의 방향을 논했고, ‘English Edition’란을 두기도 했다. 임옥인의 소설을 연재할 정도로 편집이 알찼다.

1956년 총노회가 총회로 승격될 때에 박윤선 교장이 소송 문제, 신학교 운영 문제, 기독교보 운영 문제에 대한 강력한 발언이 있었다. ‘파수군’과 ‘기독교보’ 이중 발행 문제도 포함되었다.

사실 기독교보가 창간된 것은 문서운동의 중요성을 알고, 직접 경험하였던 송상석 목사의 개인적인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신문의 중요성을 인식한 점이 있었겠지만, 신학교 이사장 한상동 목사, 신학교 교장과 ‘파수군’ 대표 박윤선 목사, 칼빈대학장 한명동 목사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약했던 교단 내 위상에 대한 송상석 목사의 경쟁심이 작용해, ‘절제시보’ 간행 경험으로 ‘기독교보’를 창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보’ 발간은 고신교회 재정적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어서, 34호를 발행한 후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제6회 총회에서는 송상석 목사가 출판위원장을 사면하고, 부채 60만환 청산은 재단 역할을 하고 있었던 기독교구제회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오늘의 ‘기독교보’가 정간 후 33년만에 1989년 9월 16일에 제1호를 발행, 그 전통을 잇고 있다.

‘파수군’은 꾸준히 발간되다가 승동측과의 합동 후 합동측 기관지로 활용되다가 고신측이 환원 후 편집인 안용준 목사가 합동측에 잔류하면서 합동측은 이를 기반으로 ‘기독신보’(현 기독신문)를 창간, 초대 편집국장이 되었으나 드센 교단 정치로 탄핵되었다. ‘파수군’은 폐간된 지 30년도 더 지나 영인본이 발간될 정도로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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