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37. 한상동 목사 소천과 교단 창립 30주년 대성회
- 작성자 : 나삼진
- 22-08-09 20:36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37. 한상동 목사 소천과 고신교단 ‘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대학 본관 건축 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1976년 1월 6일 향년 76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투옥되어 6년간 옥고를 치루었고, 해방 후 주남선, 박윤선 목사와 합하여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한국교회 쇄신운동에 앞장섰다가 총회에서 쫒겨났고, 총회에서 추방된 후에는 다른 출옥성도들 및 이약신, 송상석, 박손혁 목사 등과 고신교단을 일구었다. 그는 부산 송도 교정을 조성하고 고려신학교와 복음병원을 건축하고, 송도 본관을 건축한 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고신교회는 1977년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닷새 동안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를 부산 송도 고려신학대학 교정에서 개최하였다. 이 대성회는 총회교육부가 주최하고 수난성도 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형식이었다. 이런 규모의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를 개최하려면 그 전해 총회에 보고가 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제26회 총회에서는 그런 보고가 없었다.
총회교육부(부장 박치덕 목사)와 수난성도 기념사업회(회장 신명구 목사)가 여름을 맞아 각각 집회를 준비하는 중에 참여대상자들이 동일했고, 같은 교단에서 같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다른 두 집회를 갖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해 연합 행사를 갖기로 하고, 전국교회 성도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깊은 고려없이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로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수난성도기념사업회는 한상동 목사 별세 후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 그의 전기 ‘세상 끝날까지’와 화보집을 펴내기도 했다. 기념사업회는 한상동 목사의 교단적인 위치로 보아 총회적인 사업이어야 했으나, 그를 특별히 따르던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였기 때문에, 제27회 총회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고, 이를 총회 사회부의 산하기관으로 두기로 하고 다른 산하기관에 대한 문제는 연구하기로 하였다. 사업회가 조직될 때에는 신명구 목사가 회장을 맡았다가, 이듬해에 최해일 목사가 회장을 맡았다.
이 대회는 고신교회 창립세대 한상동 목사와 오종덕 목사가 별세하여 고신교회의 최상층 리더십의 공백이 있었던 때였다. 오종덕 목사는 고려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많은 목회자들을 양성한 성경학자로, 평안도 출신이면서도 이북출신 목회자들이 박윤선 교장과 함께 고신을 떠날 때도 끝까지 고신교회에 남았다. 5월에는 평생 고려신학교와 함께하며 사역했던 한부선 선교사가 정년을 3년이나 넘긴 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창립세대를 모두 잃어 교단적으로 영적인 공허감을 느끼던 때였다. 이 대회를 이끈 중심인물들은 몇 해 전 송상석 목사 특별재판국의 핵심인물들로, 이때부터 고신교회 제2세대의 중심인물들로 부상하였다.
고신교회 교단행사 가운데 이처럼 규모있는 집회는 처음이었다. 총회장 전성도 목사는 명예대회장이었고, 교육부장 박치덕 목사가 대회장을 맡았다. 총회장은 개회예배 축도를 담당한 것은 당시까지만해도 장로교회의 행정원리를 따라 총회장이 ‘회장’으로서 총회 사회를 보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었다.
대성회 개최 한 달 후에 회집되었던 제27회 총회 이에 대한 진주노회 제44회 정기노회(1977. 9)에서는 총회 설립 기준일에 대한 문의가 있었고, 총회에서는 교단창립 기념일을 1946년 12월 3일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의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날에 경남노회 제48회 정기노회 개회일로 노회에서 친일교권주의자 김길창 목사가 자숙의 분위기를 거부하고 1년만에 사전 모의로 노회장에 선출되었고, 노회는 고려신학교 인가를 취소했으며, 이에 한상동 목사가 “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경고성 탈퇴를 선언한 날이었다.
교단 창립기념일을 이렇게 제정한 것은 고신교회 출범의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였고, 30주년 기념 대성회를 개최한 후 이에 맞춘 성격이 짙다. 이 총회의 결의를 그대로 유지하면 고신교회가 총회에 끝까지 머물려 했던 역사적 사실과 달리, 스스로 총회를 구성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상동 목사가 경남노회에 탈퇴를 선언한 것은 경고의 의미로 ‘조건부 탈퇴’를 언명한 것임을 총회파 김양선 교수도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에서 인정하는 바다. 한상동 목사는 이듬해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한 후 노회에 복귀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같은 출옥성도 최덕지 목사에게서 ‘동참죄를 짓는다’는 비난과 결별을 감수하면서도 총회 안에서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했다.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는 김영진 선교사, 이인재, 박상순 목사가 저녁집회를 맡았고, 새벽기도회는 박상순, 이인재 목사가 이틀간씩 담당하였다. 간증으로 남영환 목사의 ‘초창기의 고려신학교’, 박상순 목사의 ‘고려파 교회의 자세’, 이인재 목사의 ‘일제하 수난사화’ 간증이 있었다. 대성회에서는 ‘고려파 신학의 정립 문제’(오병세), ‘한국교회에 고려파 교회의 존재 이유’(이근삼), ‘고려파 신학의 역사적 전망’(허순길) 강의로 고신교회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대성회를 위해 강사 김영진 선교사는 대만에서, 박상순 목사는 캐나다에서, 이인재 목사는 미국에서 왔다. 문화행사로 ‘손양원 목사 일대기’와 ‘이기풍 목사 일대기’ 영화가 상영되었다.
대회 후 간행한 자료집에 교단 통계를 592 교회, 목사 295, 강도사 32, 목사후보생 61, 세례 30,820, 유아세례 7,279, 학습 10,008, 원입교인 15,081명, 목사 237, 장로 239, 강도사 25, 전도사 147명의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네덜란드 자유개혁파교회, 호주 개혁파교회, 미국 정통장로교회, 미국 개혁장로교회 해외선교회 등과 자매 혹은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성회 자료집에서 제시하는 교단 통계에 비로소 590교회를 넘겼다. 1959년 590교회였다가 합동 후 환원시에 145교회와 경기노회 보류측 까지 170교회, 교세의 꼭 33%를 처참하게 잃었다. 이후 고신교회는 19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성장기에 교회 분쟁으로 인해 교회성장이 늦었고, 무려 17년 만에 합동 전의 교회 수 590교회를 회복한 것이었다. 한 번의 잘못된 판단과 영적인 자만과 실수가 역사에 얼마나 큰 주름을 주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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