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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35. 고려신학대학 인가와 송도 본관 신축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35. 고려신학대학 인가와 송도 본관 신축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은 개교 초기에 총회 인가는 물론, 정부의 인가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고려신학교는 일데강점기에 무너진 한국교회를 새롭게 세울 사명에 불타는 목회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총회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 교회를 위한 목회자를 배출하는 형태로 운영되기를 바랐다. 이는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프린스톤신학교의 좌경화로 메이첸이 윌슨, 알리스 교수 등과 설립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신학적 모델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학교가 총회에 속하면 총회의 주류 지도자들의 교권의 지배하에 들어갈 것을 경계한 때문이었다.

조선신학교가 한국신학대학으로 1955년 정부의 인가를 받았는데, 1946년 9월 20일 개교한 고려신학교는 초기네 정부 인가의 기회가 있었다. 한국전쟁기 피난시절 부산에 피난 와 있었던 정부가 서울로 옮겨가면서 삼일교회에 출석했던 허증수 씨가 문교부차관으로 승진되면서 고려신학교를 대학으로 인가 청원을 하면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남영환).

그러나 한상동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는 신학교육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우려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학 인가 기회를 놓쳤다. 그런데 1960년대가 되면서 신학교육의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한상동 목사는 합동과 환원의 시련 후 제14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와 고려고등성경학교 재산 일체를 총회에 기증하였고, 고려신학교는 이후 총회 직영신학교가 되었다. 그 사이에 1960년대 경제성장으로 인해 고등교육 수요가 증가하면서, 정부의 대학 인가가 없으면 군 입대나 대학원 진학, 유학 등에서 여러 불편이 있었다. 이에 신학교 교수들은 학생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고려해 대학 인가 필요성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사장 송상석 목사가 이를 반대하여 총회가 결의한 추진이 진행되지 않았다. 대학부 교수들은 대학 인가가 대학의 발전과 학생들의 내일을 위해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였고, ‘사조이사단’을 구성해 ‘학교법인 고려학원’ 인가를 받았으며, 이것이 이사장 송상석 목사와 대학 교수들과의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이미 정리한 바 있다.

제20회(1970) 총회에서는 고려신학교 관련 몇 가지 중요한 결의를 하였다. 박윤선 교수 초청위원으로 송상석 한상동 목사로 선정하였고, 고려신학교 본관 3층 연건평 610평을 신축하기로 하였으며, 신학교 건축 기금을 위해 각 교회는 연말까지 한 차례 헌금을 하되 교수들이 각 유지를 방문하여 모금하기로 하고, 고려신학교를 정규신학대학 인가를 추진과 이를 위해 대표 3인을 선정하여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기로 한 것이었다.

당시의 고신교회 경제 상황으로서는 610평 건축 정도가 적절한 수준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고신교회가 1950년대 기독교보 창간, 칼빈학원 운영, 은급제 도입 등 여러 사역으로 확장되다가 실패를 경험한 것이 교훈이 되어, 현실성있는 계획 혹은 왜소한 계획이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총회가 그러한 결의를 거쳤지만, 재정이 여유가 없어 고려신학교 본관 건축은 진척이 없었다.

고려신학교는 단일학과로 학생 수가 많지 않았던 데다 1968년 대학 학력과 동등한 각종학교 인가를 받았고, 1970년에 대학 인가를 받았다. 그때 새로운 대학생들이 입학했는데, 이환봉, 이상규, 이신철, 강영안 등이 신입생으로 들어왔다. 강영안은 손봉호 교수가 재직하던 외국어대 화란어과로 편입해 갔고, 이신철은 다시 준비해 서울대로 옮겨갔다.

대학 인가는 이에 걸맞는 교사를 필요로 했는데, 송도 본관 신축도 추진되었는데, 당시 고신교회의 재정상황으로서는 대규모 건축 공사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상동 목사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깜펀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1972년 3월초에 네덜란드를 방문하였다.

한상동 목사가 네덜란드에 갈 때까지 차관을 요청할 계획이었지만,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내실을 목격하고 허순길, 박성복 등과 협의해 15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교사와 기숙사 신축을 위해 25만 달러의 원조를 요청하였다(허순길). 곧 5월에 총회가 열리게 되었기 때문에 한상동 목사는 개혁교회의 외국위원회와 교제하며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설교를 하면서, 신학교와 한국교회 교회쇄신운동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교회에서 1960년대 중반에 통합, 합동, 기장, 고신 등 네 개 교단으로 자리잡았지만, 1970년대 교회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서울, 경기지역의 교회들이 급격히 성장하였다. 지방색과 교권욕으로 합동측 안에서 핵분열이 일어면서 고신교회도 많은 교단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다. 고신교회가 영남에 편중되어 지방교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해 한국교회에서 위상이 약해졌고, 이를 절감하던 경기노회는 그 시기에 고려신학교의 서울 이전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고려신학대학은 우여곡절을 거쳐 1974년 8월에 지금의 송도캠퍼스 본관 기공식을 가졌다. 송도 캠퍼스 부지가 야산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토목공사가 필요했다. 이러한 고려신학대학 강당과 도서관, 강의실 등 지상 5층 1,700평 공사가 1975년 8월 준공하였다.

처음에는 이사장 이경석 목사가 건축위원장, 교장 홍반식 교수가 모금위원장을 맡았지만, 홍반식 교수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학장직을 사면하였고, 명예학장 한상동 목사와 교수들이 건축헌금 모금에 앞장서야 했다. 본관 건축에 총공사비 2억 1,400만 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는데, 국내 모금액 1억 2천만 원과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60만 길드(약 1억 원)이 지원되었다.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두 차례 건축을 이끌면서 신학교의 토대를 놓았고, 본관 건축이 완료된 시기까지 가르친 30회 졸업생까지 590명을 배출하고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필자는 고려신학대학 75학번으로 입학해 1955년 건축되었던 구교사에서 첫 학기를 공부하고 이후 본관에서 공부했는데, 8월에 본관이 준공되었을 때, ‘고신대신문’ 기자로서 신축교사 르뽀 기사를 작성한 바 있다. 송도 본관 건축은 고려신학대학의 기초를 놓은 것으로, 향후 의예과 설치 등 고려신학대학의 미래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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