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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33. 교회와 국가의 문제와 김해여고·밀양고교 국기경례 거부 사건(1973)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33. 교회와 국가의 문제와 김해여고·밀양고교 국기경례 거부 사건(1973)

대한민국에서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는 헌법상 중요한 기본적 자유이지만, 국가가 이를 늘 보호했던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해방 후 두 차례 양심의 자유를 억압받아야 했다. 오늘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나아가 교회와 국가의 문제나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학자들은 이에 많은 관심을 갖지도, 깊이 있는 연구를 하지도 못했다.

한국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시대에 열심히 믿고 성실하게 산 것 같지만, 뒤돌아보면 군사 구데타나 시월 유신에 협조하였거나,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여하여 군부 독재를 정당화시켜준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회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입장 표명이나 행동에 신중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의 제국주의적 억압에 단호하게 저항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나 부정선거에 대해 대통령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협력했고,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과 전체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시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침묵으로 협력하였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담론에 교회의 선지자적인 사명을 견지하지 못하였고, 마치 ‘벙어리 개’(사 56:10)와 같은 형국이 되기도 했다. 가족계획을 통한 산아제한이라는 비성경적인 정책에 협력하다 보니 불과 30년 만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합계출산율을 갖게 되었고, 이제 국가와 민족의 미래나 그 존립을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고신교회가 깊이 관련된 국기경례 거부 사건은 해방 후 두 차례 있었다. 먼저는 해방 후 얼마지 않아 1950년대 국기경례가 심각한 양심의 문제가 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중심이 된 신탁통치가 이루어져 정부 조직 후 군사 시스템은 미군의 지휘체계를 갖추었지만, 군인들은 대부분 일본 군대에서의 경험이 전부였고, 장교들의 의식 또한 일본군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90도에 가까운 국기 배례를 하던 전통이 계속되었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양심의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에 기독교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행정부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의 의견을 많이 청취하던 분위기에서, 교회는 그 국기배례의 시정을 요구하였고, 손양원 목사 등은 대통령을 면담하기도 하였다. 고신교회는 그 시정을 위해 건의문 4만 매를 배포하며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제출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학인 목사의 아들로 전국SFC 창립 부위원장 이영일의 경우는 이는 공군에 갔다가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로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국무총리 고시로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변경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1970년대 초반에 일어났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70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면서 다음 선거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이듬해 ‘시월유신’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 선거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바뀌면서 독재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에 고등학교까지 교련교육이 강화되었고,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나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조하며 현실 정치에 무관심하던 고신교회 성도들에게도 이는 신앙양심의 문제가 되었다.

1973년에 김해여고와 밀양고등학교에서 고신교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국기경례 거부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주 3-4시간의 교련 수업과 정기적인 검열대회가 있던 가운데, 1973년 9월에 교련검열대회를 앞두고 김해여고 학생 35명이 국기경례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 22명을 제적 공고하였다가 최종적으로 유영화(현 정주채 목사 부인), 박명순(현 러시아 선교사) 등 여섯 명이 퇴학을 당하였다. 이들은 미션스쿨 브니엘고등학교의 배려로 공부를 계속하다가, 소송이 제기되면서 퇴학당한 학생은 전학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해야 했다.

이에 대해 제23회 총회에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국기에 대한 맹세 문제는 총회장, 남영환, 김경래 3인에게 맡겨 연구 발표’하도록 했고, 제24회 총회에서 ‘우리는 국기에 대하여는 주목으로 한다. 구호도 주목으로 변경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결의하였는데, 모든 짐은 학생들 스스로 져야 했다. 최해일 목사가 육영수 여사를 만나 협조를 구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국가가 전체주의적으로 흘러 분위기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이같은 일은 밀양종합고등학교에서도 일어나 김재용, 김상용, 장지연, 최영식 등 다섯 명의 학생들이 자퇴했다. 김재용은 브니엘고등학교에 편입하여 고등학교를 마쳤고, 전문학교를 거쳐 고신대학에 편입, 신대원을 졸업하고 필리핀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이 시기에 예림중앙교회 김종한 목사가 ‘국기경례와 애국사상: 기독교인은 왜 국기경례를 반대하는가’라는 책을 펴내었다. 이 책자는 등사판 46판 24면에 애국가, 책자 편집 동기, 국기경례 구호변경의 긴급성, 1972년에 〈크리스찬 신문〉에 낸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질의’, 국기경례에 대하여(이학인), 손양원 목사의 국기배례-부흥회 설교문(1949. 11. 3)과 한국기독교연합회가 발표한 ‘국기배례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입장을 천명함’ 성명서(1949)등 이 문제에 대해 한국교회사 연구에 의미있는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그의 단호한 가르침은 밀양지역 학생들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학생들이 이 책자의 내용과 같은 가르침을 받아 국기경례를 거부했는지, 국기경례 거부 사건이 나온 후 이 책자가 나왔는지는 발행연도를 명기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당시 부산시교육위원회에서는 각 고등학교 단위로 ‘고려신학파’에 출석하는 학생들의 수를 파악해 보고하도록 했다.

이 문제의 여진은 그후에도 계속되어 군목후보생이었던 전원호가 ‘개혁신앙’ 1980년 1/2월호 합본호에 ‘국기경례 문제 일고’를 기고했는데, 총회의 입장과 달라 필화사건이 되었고, 그 부분이 제거된 상태에서 배본되었으며, 편집인 심군식 목사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편집장 김성인은 편집장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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