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3) 한국 사회에 큰 충격준 ‘사이비 종교
- 작성자 : 김성진
- 14-01-20 20:26
[역경의 열매] 김경래 (3) 한국 사회에 큰 충격준 ‘사이비 종교’ 보도로 해직
- 2014.01.21
조선신문학원에서 언론계 대선배 오소백(1921∼2008) 선생을 만났다. 1953년 오 선생의 추천으로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가 됐다. 이 중앙일보는 65년 창간된 현재의 중앙일보가 아니라 해방 직후 서울에서 창간되다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에서 발행되고 있었다. 오 선생은 “현장을 보지 않고 말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늘 강조했다.
한 기자가 화재 현장에 가지 않고 소방서 측 취재로만 기사를 쓴 적 있다. 오 선생은 그를 당일 다른 부서로 발령 냈다. 46년 조선신문학원을 졸업한 그는 48년 합동통신을 거쳐 부산일보 사회부장, 중앙일보 사회부장으로 일했다. 이후에도 6군데 신문사에서 사회부장으로 일했다. 후배들은 그를 ‘영원한 사회부장’이라고 불렀다.
나는 피난지 부산에서 햇병아리 기자였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기사 마감 시한에 쫓겼다. 기자 생활 첫해 부산 영도 앞바다에 북한군 선박이 나타난 사건을 단독 취재했다. 이 일로 사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함태영 부통령을 단독 인터뷰하기도 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경남 진해 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나는 기자로서 사명감과 성취감을 동시에 맛봤다.
전쟁이 끝나고 부산으로 피난 왔던 언론사들도 환도했다. 내가 일했던 중앙일보는 환도 후 세계일보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발행 중인 세계일보가 아니다. 60년대 초 폐간됐다. 55년 말 전국에서는 일간지와 통신사가 56개, 주간지 115개가 발행됐다. 서울에서만 17개가 발행됐다. 그야말로 언론사 춘추전국시대였다. 그중 동아일보가 17만부, 경향신문이 10만부, 국제신문이 7만8000부 발행됐다.
한국은 혼돈의 시대였다. 50년대 중반 한국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났지만 이념 갈등으로 남북이 분단됐다. 3년 넘게 동존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전쟁 후에도 이산가족이 넘쳤다. 정치는 안정되지 않았고 가뭄 홍수와 같은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사이비 기독교가 판쳤다. 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55년 한국예수교부흥협회가 젊은이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적극 포교 활동을 벌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주기철 한상동 목사를 존경하던 나는 사이비 기독교 창궐을 두고 볼 수만 없었다. 57년 3월 8일자 세계일보에 ‘괴(怪) 전도관의 정체-남녀 12명 혼음?’이라는 제목으로 1면 기사를 썼다.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문제를 시리즈로 연재했다. 한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주간 비판신문에도 연재돼 큰 방향을 일으켰다.
나는 취재 내용을 보완, ‘사회악과 사교운동’이란 책으로도 냈다. 182쪽 분량이었다. 신흥종교의 생성, 추종 세력의 실체, 폭로 계기가 된 혼음 사건 진상, 교리 문제점, 신흥 사이비 종교 창궐 이유 분석 등이 상세하게 담겼다. 그러나 57년 내게 돌아온 것은 결국 해직 통보였다. 신문사 경영진이 외부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그때 나는 1남3녀를 둔 가장이었다. 2년 남짓 무척 곤궁했다.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내게 미국 여행 기회가 생겼다. 미 북장로교 드와이트 말스베리 선교사 요청을 받은 부산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가 나를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강사로 추천한 것이다. ICCC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에 대항해 칼 매킨타이어 목사가 만든 복음주의 기독교 단체였다. WCC가 자유주의 신학 조류라면 ICCC는 보수주의 신학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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