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2) 독립운동가 차병곤 선생의 누이를 아내로
- 작성자 : 김성진
- 14-01-20 20:24
[역경의 열매] 김경래 (2) 독립운동가 차병곤 선생의 누이를 아내로
- 2014.01.20
나의 아내는 독립운동가 차병곤(1928∼1945)의 누이 은희(1930∼2008)다. 장인은 일제 강점기 헌신하다 요절한 차재선(1902∼1933) 전도사다. 부산 초량교회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 1946년 진주사범학교 졸업 후 나는 부산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일했다. 현재의 초등학교다. 아내는 당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맘에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전도사가 중매에 나섰다. 반년가량 교제했다. 아내의 집에 처음 간 날 무척 떨었던 것 같다. 옆방에는 선을 보러 온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가 가득했다. “외모가 촌사람 같다” “행동거지가 어수룩하다” 등 대부분 평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근데 한 할머니가 “밥 먹는 걸 보니 복스럽네. 은희 굶기진 않겠다”며 적극 찬성해 혼인 승낙을 얻었다.
고향 통영에서는 나의 혼인을 서두르고 있었다. 외동아들의 혼사를 빨리 보고 싶어 했다. 1949년 내 나이 스물 둘에 결혼했다. 장인은 아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교사생활을 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전도사로 일했다. 장인은 본격적으로 신학을 하기 전인 20대 후반에 신학잡지 ‘활천(活泉)’에 설교를 연재할 정도로 뛰어난 영성가였다.
장인은 전도사로 일할 때 손양원 이인재 목사님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세 사람은 혹시 누구라도 먼저 죽으면 남은 이들이 먼저 간 가족을 책임지기로 약속했다. 실제 두 목사님은 장인이 돌아가신 뒤 아내의 가정을 돌봐주셨다. 나의 아내는 이인재 목사를 아버지로 알고 성장했다. 두 목사님은 일제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됐다. 손 목사는 한국전쟁 중 순교했다.
장인의 피를 이어받은 차병곤은 1943년 동래고 전신인 부산실천상고 재학 중 항일단체 순국당(殉國黨)을 결성했다. 당수로 활약하던 그는 영도다리에 ‘대한독립만세’라고 벽보를 붙이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광복군 동참을 위해 해외 망명을 하려다 일경에 붙잡혀 투옥됐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풀려났으나 고문 여독으로 곧 한 달 만에 숨졌다.
정부는 1995년 그의 공훈을 기려 애국장을 추서했다. 아내는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 자라서인지 외유내강(外柔內剛)했다. 이웃에게는 부드럽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남편에게는 평생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다. 정·관계 진출이나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반대했다. “여보, 권력과 명예를 뒤쫓는 걸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지 않아요. 하나님 뜻에 따라 하나님 일을 해야 해요.”
한국전쟁 발발로 나는 교사생활을 접고 1950년 12월 육군보병학교 간부후보생으로 자원 입대했다. 하지만 훈련하던 중 급성맹장염에 걸렸다. 제5육군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어느 날 ‘프레스(PRESS)’ 완장을 찬 미 뉴욕타임스 종군기자가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내게 다가왔다. 외상이 적고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간부후보생을 찾았던 모양이다.
“동족끼리 벌이는 이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불과 7주 군사교육을 받은 후 전방에 투입되는 심정은 어떠했는가?” 그는 ‘소모품’ 같은 군인들의 심정을 취재했다. 몇 주 후 그 기자가 병상으로 내 얼굴까지 실린 신문을 가져왔다. 날카로운 기사에 매료됐다. 기자가 매우 멋지게 보였다. 나는 후유증으로 입대 1년여 만에 의병제대했다. 건강 회복 후 부산에 있던 조선신문학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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