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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경래 (1) 백인 선교사에 호통치던 외조부… 교회 지어 헌납


[역경의 열매] 김경래 (1) 백인 선교사에 호통치던 외조부… 교회 지어 헌납
  • 201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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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로부터 세 차례 이상 역경의 열매 연재를 요청받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비교적 근래까지 요청이 올 때마다 나는 사양했다. “역경의 열매에는 역경을 딛은 훌륭한 분들이 나온다. 나처럼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 거기 어떻게 나갈 수 있나.”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피하고 싶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 탓일까. 하나님이 부르실 날이 가까워져일까.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1928년 4월 3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남6녀 중 다섯째였다. 아버지 김상기(1890∼1963)와 어머니 하은혜(1893∼1969)는 딸만 넷을 낳은 뒤 나를 얻었다. 어머니의 큰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는 내 신앙의 모태다. 외조부 하강진은 경남 지방에서 신앙을 가장 일찍 받아들인 분이다. 1907년 통영 한 장터. 백인 선교사가 성경을 들고 전도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뭣 하는 짓이오. 이곳을 떠나시오.” 하얀 도포 차림의 외조부는 노방전도하던 선교사에게 화를 냈다. 선교사는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저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를 전하러 온 것입니다.” 외조부는 선교사의 인자함에 감동받아 예수를 영접했다. 집마저 기도처소로 내놓았다. 외조부는 1916년 집 마당에 미수교회를 짓고 헌납했다. 그는 영수(領袖)가 되셨다. 당회가 조직되지 않은 교회에서 임시로 교회를 인도하는 이를 장로교에서 영수라고 한다. 충무교회 90년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는 부산을 근거로 하여 경남 지역을 선교 지역으로 삼았다. (중략) 대화정교회 교인 하강진씨는 자택에 미수리 기도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미수교회 시작이다.’ 조부는 1남6녀를 두셨다. 그중 셋째 딸이 내 어머니다. 어머니는 평생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하셨다.

나의 부친은 본래 유학자였다. 한동안 군청 서기로 일하다 은퇴하셨다. 기독교 신앙은 없었지만 어머니의 교회 출석을 반대하지 않았다. “땡∼땡∼땡∼” 주일 교회에서 예배 예비 종이 울리면 모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서 쌀 가져오란다. 돈 가져오란다. 어서 교회 가라”고 농담하며 재촉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기도 속에 내가 아들로 태어나자 예수를 영접했다. 어린시절 우리 집은 통영 읍내였다. 나는 외가가 있던 미륵도 미수리에 자주 놀러갔다. 1932년 미륵도와 통영 사이에는 해저 터널이 생겼다. 동양 최초였다. 나는 이 터널을 지나 외가에 자주 갔다. 터널 주변에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다. 외가는 찬송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간절한 기도 소리가 들렸다. 성경 읽는 소리가 이어졌다.

부친은 마을에서 은퇴 후 농사를 짓고 서당을 운영했다. 유교적 전통에 익숙한 아버지는 신앙생활에 적극적이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주일이면 우리에게 “교회 갔다오너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성품이 너그럽고 밝았다. 어머니는 깊은 신앙심에 낙천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는 이 속에서 신앙심 깊고 밝은 아이로 자라난 것 같다.

통영소학교 시절 나는 전교 1, 2등을 했다. 당시 성적이 좋은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사범학교를 적극 권했다. 나에게도 진주사범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5년제였다. 졸업 후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사범학교에 입학할 때 나는 열세 살 소년이었다.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났다. 진주 대봉동에 하숙집을 얻어 학교를 다녔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김경래 장로 약력=1928년 경남 통영 출생. 46년 진주사범학교 졸업. 71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72년 국제기드온협회 서울캠프 회장, 83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사무총장, 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사무총장, 95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고문, 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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