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이단자 처형은 그 시대의 오류다
많은 사람이 존 칼빈은 어거스틴을 잇는 위대한 신학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그의 친구 세르베투스를 사형에 처하는 데에 동조한 것은 아주 큰 과오였다고 지적한다. 세르베투스가 처형된 자리에는 칼빈의 추종자들이 세운 묘비가 서 있는데, 그 묘비에는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의 위대한 개혁자 칼빈을 존경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후예들로서 우리는 그 시대의 오류이자 그의 오류를 척결하고 종교개혁과 복음의 진정한 원리들을 따라서 양심의 자유를 견지하면서 1903년 10월 27일에 이 화해의 기념비를 세운다.”
이 기념비를 세운 칼빈의 추종자들은 이단자를 처형하는 일은 “그 시대의 오류”였다고, 그 시대에 흔히 일어난 일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칼빈의 시대와 지금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우리는 주어진 문화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16세기와 21세기의 다른 상황을 참작해야 한다는 말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칼빈의 오류를 인정하는 데서는 그의 이단자 처형이 지금의 시대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단자 처형의 시대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때에 가톨릭에서는 자기네 교회의 아성을 무너뜨리려는 이단적인 세력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교회의 권위를 해치려는 세력을 척결하려는 가톨릭의 조치는 이해할 만하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리기 오래 전에 영국의 위클리프(1325?-1384)가 교황청의 오류를 지적하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자 교황청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40년이 지난 후에 그의 유골을 파내어서 불사르고 그 재를 근처의 수위프트 강에 뿌렸다. 이것은 교회에 대항하는 세력에 대한 경고였다. 그러나 그러한 잔혹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 가톨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교황청에서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이단자들을 화형, 교수형, 수장 등 극형에 처했다.
교회지도자들은 그러한 잔혹한 조치는 교회를 지키려는, 하나님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단자 처형에 대해서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이단자들을 척결하는 것은 사탄과 싸우는 영적 전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영적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방부족 사이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에서 찾아볼 수 있고, 그러한 전쟁들을 여호와가 직접 지시하셨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은 이단자 처형을 성경에 근거해서 정당화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볼 때 그런 잔혹한 이단자 처형은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만행이다.
개신교 측에서도 그들이 새롭게 세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가톨릭에 대항하고 자체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단적인 세력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했다. 급진적인 개혁 성향을 가진 재세례파에서 유아세례에 반대하고 중생을 체험한 사람만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가톨릭뿐 아니라 루터교회와 스위스의 개혁교회가 나서서 그들을 박해했다. 재세례파의 지도자 만초는 호수에 빠뜨려서 죽였고 불라우록은 화형을 시켰다. 종교개혁 시대를 통해서 4, 5천 명의 재세례파 신자들이 칼에 찌려 죽거나 화형이나 수장을 당했다.
우리는 지금 알라의 이름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자살폭탄 테러, 잔혹한 처형 등을 보면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그들의 광신적인 태도를 개탄하다. 16세기와 17세기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이단자 처형과 전쟁이 일어나고 가톨릭과 개신교 자체 안에서 이단자들을 잔혹하게 처단한 광신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에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도시를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는 세르베투스를 처형하는 데 동조한 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그리 대단한 과오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파커는 그가 쓴 칼빈의 전기에서 “세르베투스에게 내려진 형벌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문제에 있어서 20세기의 견해와 16세기의 견해 사이에는 얼마든지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맥그래스 역시 그의 책에서 “16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날 현대인들과는 달리 사형제도에 대해 혐오감을 거의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은 불미스럽고 부정적인 것을 편리하게 제거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제네바 시 역시 전혀 예외가 아니었다.”고 썼다. 분명 그들은 우리가 사는 시대와 다른 시대에 살았다. 오늘날과 달리 그들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그 시대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칼빈의 행위를 정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르베투스가 죽은 자리에 세운 기념비의 비문에서 칼빈의 추종자들은 세루베투스의 처형에 관여한 칼빈의 오류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할세마 역시 “20세기에 이르러 역사를 돌아볼 때 칼빈이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르베투스를 대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칼빈의 이단자 처형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시대에 와서는 아무리 극악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죄수가 극단적인 고통 가운데서 죽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중시해서 많은 나라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했거나 우리나라처럼 사형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사형을 시키지 않고 있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지만, 우리의 눈으로 보면 IS의 만행이 끔찍한 것처럼, 종교 개혁기에 일어난 광신적인 처형 역시 끔찍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칼빈 같은 위대한 신학자조차도 그가 살았던 시대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다시 말해서 그 시대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관용이 부족했던 칼빈
칼빈의 전기를 쓴 사람들은 칼빈이 시대를 앞서 간 인물로서 관용과 자유의 길을 가리켜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제네바 사역 기간에 나타난 사실들을 21세기의 관용의 시대의 눈으로 보면 경건을 극도로 강조한 그의 교회에서는 관용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가 제네바에서 2년 동안 사역한 후에 추방당한 주된 이유는 “지나친 열정”과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열정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을 것이고 사람들을 아주 부드럽게 대해서는 새로운 신앙생활을 효과적으로 훈련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이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2년 동안의 사역 후에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것을 보면 그가 요구한 경건성은 지나쳤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사역한 제네바에서는 술을 마셔서도, 춤을 추어서도, 노래를 해서도, 연극을 해서도 안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오랫동안 이런 것들을 모두 허용했었기 때문에 갑자기 이런 인간적인 쾌락을 금지 당했을 때 제네바 사람들은 참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칼빈이 신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삶을 위해서 지나칠 만큼 금욕적인 삶을 강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칼빈의 전기를 쓴 사람들은 그가 20대 초반에 세네카의 『관용론』에 주를 달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세네카의 『관용론』을 편집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그의 관용적 태도로 인해서 교회개혁의 뒷전으로 밀려난 것과 『관용론』에 주를 단 칼빈이 종교개혁을 주도한 것을 대비해 보면, 세네카가 주장한 관용이 칼빈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가 『관용론』에 관한 책을 낸 것은 그의 회심 이전이었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회심 후에 이전에 쓴 작품들을 모두 쓰레기로 간주한 것처럼, 그는 회심 후에 인문주의와 관용을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칼빈에게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주장하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을 강조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외면했다. 그의 신중심적 사고는 중세의 교회가 강조한 것 이상이었다. 이러한 그의 세계에 인문주의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그가 인문주의에서 받아들인 것은 인문주의자들의 글에 나타나는 논리학이나 수사학 같은 글쓰기의 방법론, 즉 형식이었을 뿐, 인간을 중시하는 인문주의의 내용은 아니었다. 세르베투스를 처형하는 데에 동조한 칼빈은 광신의 시대에 그 시대의 풍조를 따라서 산 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 광신의 시대에는 유럽 어디에도 관용이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그들의 교리를 지키는 일에 몰두해서 타협점을 찾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츠바이크가 칼빈과 카스텔리오의 갈등을 다룬 책의 영어판 제목을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라고 붙인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칼빈의 제네바에서도 그가 내세우는 신조 외의 것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추방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이러한 일은 관용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마치면서
광신의 시대에 행해진 이단자 처형을 지금 관용의 시대에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시대에 내세운 신학적 주장 역시 합리성과 인간의 의지가 중시되는 현대에 와서는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리처즈 멀러는 『16세기 맥락에서 본 진정한 칼뱅신학』에서 칼빈의 교리적 서술들은 “그의 시대에 뿌리박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멀러는 칼빈이 말한 것은 16세기의 상황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 시대에는 타당했다 하더라도 현대에 와서 그의 교리적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손봉호는 그의 책 『나는 누구인가: 현대인과 기독교의 만남을 위하여』의 전반부에서 칼빈을 여러 번 언급하는데, 후반에 가서는 칼빈이 부인한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다. 그는 칼빈주의를 가르치는 신학대학에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로서 특히 윤리학자로서 자유의지를 부인한 칼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칼빈이 강요했던 경건성을 재현하고 그의 신학적 주장을 가감 없이 전달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교인들은 영화관에 가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 갈 때는 정장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청바지가 들어왔을 때 교인들이 청바지를 입고 교회에 오는 것을 금했다. 최근까지도 교인들이 화투를 치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몇 년 전 어느 신학대학원의 세미나 시간에 한 학생이 자기네 처가식구들은 가톨릭인데 명절에 모이면 고스톱을 하더라고, 그것을 보면 가톨릭은 이단이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몇 해 전에는 어느 장로교 총회장이 예배시간에 박수치지 말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주장했던 경건성의 잔재다.
만약 지금 어느 목사가, 칼빈이 제네바에서 강요한 대로, 교인들은 춤을 추어서도, 노래를 해서도, 영화관에 가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 교회에서 쫓겨날 것이다. 지금도 교인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칼빈이 강조한 경건성의 잔재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유지되는 것은 술에 취하지 말라는 성경의 기록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술 마시는 것이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장로교의 예배가 근엄하다는 것은 옛말이다. 장로교에도 열린 예배가 도입되었고, 장로교의 목사가 목회 유모어집을 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16세기와 21세기의 문화가 아주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칼빈이 강조한 경건한 삶이나 칼빈의 신학적 주장을 현대사회에 가감 없이 적용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16세기는 신정국가의 시대였지만, 지금은 정교가 분리되어 있는 다종교 시대다. 칼빈은 르네상스가 꽃피는 시대에 살면서 신의 절대주권을 주장했지만, 우리는 합리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서 가치의 상대성이 중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16세기는 절대군주의 닫힌 시대였지만, 지금은 민주주의의 열린 시대다.
좀 더 부연하자면, 16세기는 농경사회의 끝자락이었지만, 우리는 지금 17세기에 시작한 산업사회를 벗어나서 탈산업사회를 맞아, 토플러의 말을 빌리면, 제3의 파도를 타고 있다. 16세기에 시작한 지구 탐험은 이제 우주탐험으로 발전했다. 칼빈의 시대에는 종교가 과학의 위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21세기는 종교가 과학의 공격을 받아서 수세에 몰려 있는 시대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인간의 의식의 변화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칼빈의 시대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이단자 처형이 지금 와서는 끔찍한 만행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지난 500년 동안 이렇게 시대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인간이 사물을 보는 눈도, 사회를 보는 눈도, 신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눈이 달라지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칼빈이 16세기에 살았던 한 명의 신학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광신의 시대에 살았던 칼빈은 인간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이라고 가르치면서 인간의 전적인 무능과 노예의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개개인의 능력을 계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지금 그러한 인간의 삶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주 적어졌다.
16세기에 살았던 칼빈의 신학은 현대인의 눈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보려고 하는 바르트, 본회퍼, 혹은 틸리히의 신학과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현대인들에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신학적 주장을 가감 없이 전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안목이 없는 무지의 소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교회에서나 기독교 단체에서 성시화운동이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성시화는 칼빈이 살았던 시대처럼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신정국가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정교가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는 다종교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를 성시화하자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다. 한때 이명박 씨가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한 것도 칼빈 시대의 성시화를 답습하려는 발언인데, 그는 웃음거리고 되고 말았다.
어느 보수교단의 총회에서 예배당 내부의 전면에 십자가를 세우지 않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강단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속죄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우상이라고 생각하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의 오류는 개혁자들의 신앙을 본받으려는 지나친 열성에서 나온 것이다. 한쪽에 너무 치우치면 분별력을 잃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기본적인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칼빈의 시대와 지금을 분별하면서 칼빈의 신학적 진술이 지금의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을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상징과 우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일부 보수교단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의식 수준을 어림할 수 있다. 그 지도자들의 무지는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현대인의 어투에 맞지 않는 개역개정판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 범하는 이러한 우행을 보면 안타깝다. 에라스무스가 가톨릭교회를 풍자한 『바보 예찬』에 나타나는 상황을 현대의 한국교회에서 보는 듯해서 참으로 안타깝다.
|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