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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12)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 발행과 문서 활동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12)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 발행과 문서 활동

한국 첫 근대 출판사 조선聖敎서회 세워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입력 2014-09-16 03:41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12)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 발행과 문서 활동 기사의 사진
1897년 첫 발행된 '그리스도신문'은 당시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대중을 위한 정보를 게재해 민중계몽과 한국문화 창달에 기여했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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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한국의 출판문화에서도 선구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문서사역을 매우 중시해 한글의 사용과 연구, 사전과 성경·찬송, 전도문서 간행에 힘썼다. 인쇄 매체는 선교의 주요 요체였다. 전도지와 소책자, 잡지 신문은 복음전파를 위한 전령의 노릇을 감당했다.

언더우드는 1888년, 조선성교서회(Korea Religious Tract Society)의 설립을 제안하고 준비했다. 이 일은 그가 사전 출판을 위해 일본에 체류하는 일로 지연되다가 1890년 6월 25일에 성사됐다. 서회가 창립된 후 가장 먼저 발행된 첫 작품은 웨일스 출신 중국 선교사였던 그리피스(Griffith J)가 지은 간단한 교리서인 ‘성교촬리(聖敎撮理)’였다.

순 한글 내려쓰기로 편집된 이 교리서는 기독교 교리 소개와 함께 기독교인은 그가 속한 나라에 대해 충성하고 전통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내용이 담겼다. 조선성교서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출판사로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이다.

한국 기독교 신문의 효시

인쇄매체 중에서도 신문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던 언더우드는 1897년 4월 1일부터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을 발간했다. 이 신문은 2개월 앞서 아펜젤러가 간행한 ‘죠션그리스도인회보(Korean Christian Advocate)’와 함께 한국 기독교 신문의 효시가 된다.

주간신문으로 매주 목요일 8면씩 순 한글로 간행됐고, 국배판 크기로 4호 활자를 사용했다. 면마다 3단 종서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광고도 실었고 캠페인도 벌여 근대 매스컴의 역할을 선보였다. 신문의 발행과 편집을 담당한 사람은 언더우드였지만 사무 일은 빈튼(Vinton)이 맡았다. 언더우드 형의 선교기금으로 간행됐다. 국내 인사와 동료 선교사들이 집필진을 이뤄 그들의 글이 언더우드의 번역으로 실렸다.

창간호는 신문 발행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이 신문이 백성을 도우려 함이요 착하고 참된 것만 하려 함이니 일이 참되고 바른 것만 기록함이오. 아무 때라도 어그러지는 일을 알면 바로 말함이오. 옳은 일은 참 능함이니 이 신문은 더욱 옳은 것을 좇으며 밝게 하자 함이니…”라고 천명했다.

창간 논설에서도 “죠션 나라와 백성을 위하려는 것이라”고 목적을 분명하게 세웠다. 기독교 신앙 전파가 간행의 목적이었지만 당시 교인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만이 아니고 한국의 지식인과 일반 민중에게 교육 정치 경제 지식을 제공해 그들을 계몽하고 생업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예를 들면 ‘감자 농사짓는 법’ ‘소 강하게 키우는 법’ ‘위생법’ 등 삶에 구체적인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담았다. 따라서 신문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독자의 대상이 되었다. 창간 연도 신문 내용을 분석해 보면 교회 통신 74회, 공업 진흥 100회, 농업 개량 99회, 일반 교양과 세계소식 105회를 이뤘다. 1899년에만 177만6000쪽을 인쇄했다고 선교본부에 보고했다. 당시 이 신문은 전국 13도 370여명의 수령들이 구독했다. 궁궐에서도 2부를 받아보았을 정도였다. 신문대금 수금은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

이 신문은 1905년 7월 1일부터 교회연합 차원에서 감리교의 ‘죠션그리스도인회보’와 통합해 ‘그리스도신문’이란 이름으로 1907년 9월 27일까지 발행됐다. 게일 선교사가 주간을 맡았고 1907년 언더우드가 건강치유차 스위스로 떠날 때까지 사장으로 일했다. 신문은 1907년 11월 13일 ‘예수교신보(The Church Herald)’로 개명돼 발행됐다. 이후 1910∼1914년 장로교단에 의해 ‘예수교회보(The Christian News)’가 발행되었을 때도 언더우드는 이 일에 적극 협력했다.



신문 잡지 발간은 한국 문화 존중의 방식

언더우드는 잡지 간행에도 앞장섰다. 1905∼1906년에는 헐버트가 주간하던 ‘코리아리뷰(The Korea Review)’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The Korea Mission Field’라는 선교사들의 영문 월간지도 언더우드의 주간으로 시작됐다. 그의 부인은 문서사역에 재능과 열심을 보여 1906년부터 1914년까지 이 잡지의 편집 주간으로 활동했다.

언더우드는 신문사를 통해 영어나 한문 책자들을 번역해 간행했다. 한문 서적으로 ‘대주지명’ ‘상제진리’ ‘권중회개’ ‘중생지도’ ‘복음대지’ ‘예수교문답’ 등 여러 종류의 전도문서들을 간행했다. 그 외에도 많은 전도문서들을 간행해 ‘언더우드 출판물’이란 제하에서 이 문서들을 광고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출판문화 노력은 한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그 바탕은 한국 사랑이었다. 그는 1901년 안식년을 기해 한국을 떠나면서 4월 25일자 ‘그리스도신문’에서 “대한도 내 본국이라”고 기술했다. 출판문화에 관여한 그의 글들은 오늘날 한국학 연구에서 훌륭한 자료들이 되고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들이 증거하거니와 언더우드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지 않고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연구, 인쇄 매체들을 통해 한글로 기독교를 소개하고 그 위에서 한국 기독교회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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