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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이응도목사 칼럼] “응도야, 대가리 치아라!”


“응도야, 대가리 치아라!”

사실 저는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가끔 스스로 고백하기도 하고, 예리한 분들은 잘 발견해내기도 합니다. 저는 두상이 꽤 큰 편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두상의 크기에 대한 별명이 많았습니다. ‘소머리’ ‘대갈 장군’ ‘소대가리’ ‘가분수’등등... 머리가 크다는데 대한 별명들은 늘 따라 다녔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는, 당시에는 모든 학생들이 검정 교복에 모자를 착용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보다 3배 가까이 되는 돈을 주고 특별한 크기의 모자를 맞추어야 했고, 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는 철모가 맞지 않아서 충격을 완화하는 내피를 제거한 체 착용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머리만 큰 것이 아니라 키도 제일 컸고 덩치도 있어서 딱히 보기 싫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큰 두상은 저의 컴플랙스였습니다.

두상에 대한 잊을 수 없고, 또 웃을 수만도 없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저는 키 때문에 늘 교실의 맨 뒤, 쓰레기통과 청소 도구함 옆에 앉았었습니다. 앞에 앉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2때 담임선생님은 제게 ‘복음’과 같은 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학교에 일찍 등교하는 순서대로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원하는 친구 옆에 앉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파격적인 결정이었고, 정말 반가운 결정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맨 앞자리, 교탁 안에 앉았습니다. 당시에 저의 별명은 ‘대가리가 커서 슬픈 짐승’ 줄여서 ‘대갈짐승’이었습니다.

맨 앞에 앉아서 좋아할 시간도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친구들의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이 판서를 하시면 누군가 “샘예!”하고 손을 듭니다. “누고? 와 그라노?” 친구들이 대답합니다. “칠판이 잘 안보임미더!” “와, 눈이 나쁘나?” 질문한 친구가 대답합니다. “응도 대가리가 너무 커서 칠판을 다 가립미더. 응도보고 대가리 좀 치아라 카이소!” 비로소 친구들의 말을 알아들은 선생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응도야... 니 친구들이 니 대가리 때메 칠판이 안보인단다... 우짜믄 좋노? 니 대가리 좀 치아라....” 아마 선생님들도 반에서 키가 제일 큰 녀석이 큰 머리를 하고는 맨 앞에 앉은 것이 싫으셨던 모양입니다. 저는 결국 비참하게(?) 제일 뒷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제 머리에 대한 콤플렉스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가끔 멋있는 모자를 쓰고 싶은데 맞는 모자를 찾을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다만 그 때 생각이 납니다. 웃으면서 기억을 떠올립니다. “응도야, 대가리 치아라...” 부산 머스마들의 투박하고 장난스런 얼굴이 생글거립니다.

생각해보면 친구들의 요구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키도 크고 머리도 큰 친구가 앞에 앉으니 선생님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칠판 글씨를 가릴 수 있습니다. “내가 수업 시간에 보고 싶은 것은 선생님과 칠판이지 너의 뒤통수는 아니다”라는 강력한 항의가 포함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세상에 대한 성도와 교회의 의무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에 가까운 교회의 임직식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는데 저는 이 말씀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 세상이, 교회가 우리를 통해서 보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뒷모습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자꾸 자신들의 모습만 보여줍니다. 그 모습을 통해서 세상이, 이웃이, 서로가 하나님을 발견하면 좋은데.... 오히려 하나님을 가리고 자신의 추한 모습만 자꾸 보여줍니다. 세상이 답답하고 답답하여 하나님께 외칩니다. “하나님, 저 성도와 교회... 좀 비켜달라고 해주세요. 저들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요.”

재미있는 산수의 법칙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산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1과 0의 순서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므로 1이라고 합시다. 사람은 먼지와 같은 존재이므로 0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점을 하나 찍습니다. 자 이제 이것의 순서를 생각해 봅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면 어떻게 될까요? 즉 0.1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은 1/10로 줄어듭니다. 사람이 한 번 더 하나님 앞에 서면 어떻게 됩니까? 0.01이 됩니다. 하나님이 1/100로 줄어듭니다. 사람이 한 번 더 앞에 서면, 또 앞에서면 어떻게 될까요? 1/1000이 되고, 1/10000이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앞서면 앞설수록 그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앞세우면 어떻게 될까요? 1.0이 됩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온전히 보입니다. 사람이 한 번 더 하나님을 앞세우면 어떻게 됩니까? 10.0이 됩니다. 하나님을 한 번 더 앞세울 때마다 100이 되고 1000이 되고 10000이 됩니다. 하나님의 산수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겸손함이 만나는 원리이면서 우리 신앙의 원리입니다. 저는 이 산수의 원리가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이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가 앞선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의 뒷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는,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좋은 무대와 같은 교회와 성도, 하나님의 일꾼들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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