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칠목사의 성경 산책] 구약과 신약의 마지막 책 – 말라기와 계시록) - 공통 교훈(말4 장, 계22 장)
- 작성자 : HesedMoon
- 15-12-26 15:43
구약과 신약의 마지막 책
– 말라기와 계시록) - 공통 교훈(말4 장, 계22 장) 부모님이
자주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고 하셨던 말씀이 이제 내가 75 살 세월에서 느끼고 보니
눈물도 납니다. 2015 년도 며칠 남지 않은 가운데 그래도 오늘에 주님 힘으로 살아가면서
주의 말씀 묵상이 재미가 납니다. 지난 날 개혁자들이 묵상하였던 글들이 나의 도움이 됩니다. 오늘날 일반
사회를 들먹일 필요는 없고 한국 교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내 노라 하는 목자들이 뒤끝에 가서 실패하는 목회를 자주 보게 되니, 우리는 마지막이 승리하는 삶이 돼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외형적 삶이 그렇게 훌륭하게 보이지 않아도 주의 긍휼로 오늘에 다하는 삶 그리고
영원에로 직결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
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데 남자와 여자를 공히 만드시고는 구약 교회에서 이 남녀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응답하셨는지를 부단히 보여 왔습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의 마지막 책 –
말라기와 요한 계시록 –이 다 여성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경에서는 구약이 마지막 책이 역대기서이지만 우리 신교에서는 말라기가 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말라기 내용이 전형적으로 포로 후 시대 상을 보여 주면서
훗날 유대 백성들의 생활 규범이 된 바리새 파 정신의 흔적이 보여지고 있습니다(신약에 얼마나 바리새 파들이
문제 되고 있습니까). 뿐더러 말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주의 오심을 말하고 있는데 신약의 시작부터
그 성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예언했는데(말
4: 5)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천사 가브리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눅 1: 16, 17) 이렇게 구약
마지막 말라기와 신약 초두가 잘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성경의 끝에는 마지막 심판 날, 주의 오심 곧 세상에
메시야 도래를 이야기하는 것도 같습니다. 말라기는 그날이 능력 있게 임하여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초개 같이 하겠다고 하는 반면에, 여호와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이 비추겠다고 합니다(말 4: 1). 계시록 끝에서도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속히 오시기를 대망하면서 성령과
신부가 예수님의 오심을 부르고 있습니다(계22: 20). 아름다운 신부 “성령과 신부”라 할 때에 신부는 주의 교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계 19: 7-8; 21: 2, 9). 그런데 교회가 주의 신부라 불러지니(계 19: 7; 21: 2, 9) 얼마나 존귀하며, 주의
성령과 함께 주님 곧 신랑의 오심을 같이 부르짖고 대망하고 있다 하니 얼마나 존귀합니까! 성령은 말할 수
없이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데(롬 8: 26) 이 성령께서 신부와
함께 주의 오심을 목마르게 갈망하고 계십니다(계22: 17). 그런데 성경
끝에는 - 앞에서도
그러하지만- 교회가 많은 죄악들로 오염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에서 떠나 타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 3
장만 해도 소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가 그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인자 같은 신 분 앞에 얼마나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그녀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πορνεύω ,폴뉴오)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라고 한다. 특별히 바울이 쓴 고린도 서를 보면 얼마나 교회가 세상적 죄악에 노출되어
있습니까?.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음행(πορνεία ,포네이아)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고 바울이 한탄한 죄가 무엇입니까?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고 하는 근친상간의 죄악입니다. 이런 죄악은 율법이 금하고 있습니다(레 18: 8; 신 22: 30; 27: 20) 물론
이 때의 아내는 계모를 의미한다고 해석을 합니다. 이런 현상이 로마가 지배하는 시대의 교회가 당면한 현실이었습니다(정인석 목사 설교에서 인용). 교회의 이런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 노출된
죄악만 열거해도 그 타락상과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범죄상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간교한 지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교인 수가 그렇게 많고 선한 일들을 많이 한다고 하는 목자들(?)이 들통이 나서 세상에 부끄러움이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바울은 세계 일류 문화의 대 중심지에
사는 로마 교우들에게 편지 하기를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 하고는
특히 “음란과 술 취하지 말라” 할 때의 “음란”(κοίτη , 코이테)은 특별히 구별된 단어입니다. 로마 사회를 덮고 있었던 것은 “음란”(πορνεία , 포르네이아, 요 8: 41 등, 한역에는 주로 “행음”이라고 하고 있다, 계 2: 14,
20, 21; 9: 21; 14: 8; 17: 2,4; 1: 3, 9; 19: 2; 21: 8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후자의 단어를 쓰지 않고 “코이테”를 바울 사도가 골라 사용한 이유는 침대를 같이 사용하는 뜻입니다(원차희 목사 설교에서). 그래서 바울은 히 13: 4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코이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폴누스)
자들과 간음하는(모이쿠스)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Τίμιος ὁ γάμος ἐν πᾶσιν καὶ ἡ κοίτη ἀμίαντος,
πόρνους γὰρ καὶ μοιχοὺς κρινεῖ ὁ θεός. ). 한 침대에 자도 관계를 안 했다 하면
그만이지만 여기 코이테는 “정액”(sperm)을 의미합니다.
하도 교회 안에서 조차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교우들이 예배 시에 앉아 있으니
교인 하나 잃을 가 바 말 한 마디 못하고, 아니 자신이 그런 죄에 걸려 있으니 말 한마디 이 주제에 대해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전한 목사라 할지라도 언제나 이런 세상에 노출되어 있으니 스스로 넘어질 가
겁이 나서 말을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바울도 남의 죄 들먹이다 스스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꼼수를 알아채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강단에서 종종
말하여 교우들을 깨우쳐야만 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는다”(딤전 5:
24, 나는 이 말씀은 고등학교 3 학년 시절 고 황철도 목사님 설교에서 듣고 늘
기억하고 있다) 고 합니다. 우리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세상에서 부끄럼
당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여전히 교회에서 사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땅에서 고백하고 저 하늘
나라 가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엡 5: 5 과 계
22: 15 절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공인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회개해야만 합니다. 목사끼리 서로 “은교”(隱敎, 비밀스럽게 가르치는 것) 라는 희한한 말로 목사가 공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숨어서는 안됩니다. 사도 요한은 기회도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공로 의지하여 빨리 청산하고 우리 모두 빨리 저 거룩한 천국으로 향합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고 세상을 이기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여 더러워져도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 끝에 가서 보면 교회가 신부(νύμφη, 계 22:17 )라 불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면에 완전하지 않지만 여전히 싸우고 비참함이 있는
가운데 씨름하고 유혹이 있다고 해서 신랑이 더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잖아요. 그럴수록 신랑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시대에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성령과 함께
우리의 부르심에 그는 들으시고 곧장 오십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롬 8: 28). 의로우신 신랑이 자기 몸을 버려 사신 사랑하는
신부의 부르심에 왕림해 주시지 않겠어요? 우리는 계속 부르십시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부릅시다. 결단코 헛되지
읺습니다. 성령이 도우시고 그가 들으시고 그가 오십니다. 그가 속히
오실 것입니다!! 아름답지 못한 신부의 과거사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 에서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신부 대신 “아내 즉 여인”(אִשָּׁה , γυνή , 2: 14, 15) 이라고 거명합니다. 여기 아내로 나타나는 인물은
상징적이거나 의인화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가 살았을 당시의 당하는 현실에서 만나는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라기는 두 경우의 아내를 말하고 있는 데 한 경우는 육신적으로 보면 그 운명이 “잘 돼서”(?)
유대인 남자를 만나서 남편에게 존경 받고 사랑을 받고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한 경우는
아내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남편에게서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젊을 때의 사랑과 신의는 온데 간데 없고 궤사(=버림, breaking)를 당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위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첫 경우는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율법이 금하는 것을 반역한 죄입니다. 이방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포로 후 시대에 하나님 백성에게는 안 팎으로 어려운 현실 속에서 주위에 있는 이방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자기 유대인 정체를 내팽개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얼마나 책망하고 개혁하였습니까! 개혁하는 일이 얼마나 쓰리고 아파도 도려내야 할 것은 도려내는 과감한 일을 해 냈습니다.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애정의 줄이 굳어졌지만 끝장을 내야만 살 길이 생긴다고 믿었습니다. 곧 이방 여자와 아이를
내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오히려 소망이 있다”
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에스라 9-10장;
느 10: 30; 13: 23f, 나의 책, 구속사적 성경해석, pp 233-237).
말라기 선지자는 이방 결혼을 한 자는 바로 야곱의 장막에서 끊어버리겠다 고 합니다(말 2: 1-12) 이와는 전혀
다르게 말라기 선지는 결혼한 아내는 언약의 아내이기에(잠2: 17; 겔 16: 8)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결혼 생활이 신실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앞에 너의 일도 범죄이거니와 같은 선상에서 “이런 일도”(זֹאת ,말
2: 13) 하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이방 여인과?) 결혼 생활을 접는 혹독한 일 즉 젊을 때의 아내를 버리는 남편의 경우도 있는데
말라기는 이 또한 반대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다루고 있습니다(2: 13-16). 당대에 새롭게 일어나는 죄악상을
보고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의 현장에 적용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아내를 부당하게 내 좇는 다고!
그것 안될 말이지 그래도 그녀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던 짝이며, 생명을 두고 언약한
너 언약의 아내라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 대하여 감동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내가 이혼을 미워한다” 고 합니다(말
2: 16; 사 50: 1). 그것이 말라기 정신과 같은 마태복음
19 장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결혼생활의 신실함을 원하시데 사람 마음의 완악함에 맞추어서가 아니고
“본래에”(ἀπ᾽ ἀρχῆς , 마 19: 8 ) 기초를 둔 것입니다.
창조의 언약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제도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신(영)은 버림받는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말라기 선지자가 선포한 대로 그녀의 정당한 법적 위치에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은
심판도 구원도 하시며, 얽매기도 해방도 하시며, 죄의 곤고(困苦)를 드러내기도 하고 생명의 길을 열기도 하십니다. 신랑의 사역 이러고 보니
구약의 끝에서와 신약의 결말이 아주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아내는 죄가 있지만 신부로 나타나고 있지만 구약은 이방인 아내를 도려내면서
이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라기와 계시록은 다 아내나 여인들을 말하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연의 일치라기 보다는 성경 저자(성령)의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그 첫째 이유는 성경은
신부를 교회로 거명하면서 인간의 결혼 생활이 사랑과 신실함에 기초돼야 함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가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심같이 남편은 자기 아내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합니다(엡 5: 25f). 말라기 선지도 남편이 자기
아내에 대하여 신실함을 지켜야 한다는 투쟁을 그리스도가 자기 교회의 순수성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에 비하여 이미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말라기 예언은 자기 백성이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을 버려서도 이교도와 분리해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부 곧 하나님 백성을 청결한 신부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말2: 11b 는 이렇게 말합니다; “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קֹדֶשׁ , santuary )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다”
고 한다. 여기 성결은 여호와의 속성도, 여호와의
성전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라 “여전히 덜하기는 하지만 결혼의 거룩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에 이렇게 말 되어진 곳이 없다”(Keil and Delitzsch) 고 한다.
결혼이 얼마나 신성해야 함을 말라기는 가르치면서 하나님 섬김과 연결 지우고 있습니다. 둘째로 신약의
결말과 구약의 결말이 다 같이 말하는 주제 또 하나는 주의 백성에게 주의 날을 대망하고 부르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하면서(말 3: 2), “ 극렬한 풀무불 같을 것”(4: 1) 이고 그 때에는 용서가 없으며 선악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니 “정한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 역시 계 22 장에서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그 날의 전개와 생명수 흐르는 강이며 성에 들어갈 그 확실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
곧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계22: 15) 고 한다. 말라기 이후 계시록 사이의
신약은 말라기 가르침을 더 채우고 확장해 가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러하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
곧 결혼 생활의 거룩이며, 교회의 세상 속에서 “분리”에로 부르심이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두 성경은 회개를 촉구하는 삶이다. 계시록 끝에서는 “마지막으로 신부가 성령과 함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고 부르는 자마다. 그 날을 대망 하면서 긴장을
갖고 전 삶이 회개해야 할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결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예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신실이 섬기지 않는 남편으로, 아내로 여기겠다고 하는 뜻입니다(말 2: 13-16). 결혼생활의 “눈물과 울음과 탄식”이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한다고 합니다. 결혼 생활의 신실함, 일상 가정 생활에서 돈독한 관계에서 주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이것이 바로 주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랑의 표현이고 이것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하늘의 신랑을 열망하는 본질적 이유입니다. 하나님 말씀 따라 기도하는 가운데 능력 받아 신자들은 거룩한 삶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것을 배설물(=똥)로 여기고 하늘의 보화 주
예수님만을 모두를 삼는 삶입니다. 우리 내외는
우리 차로 미국에만 12 번을 교회를 방문하는 가운데(그래도 아직 와이오밍과 사우스 다코타와 하와이 주는 못 갔다)
발견한 것은 교인 수가 크든 작든 간에 생기가 있고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는 오래 기도하면서 주님께 온전히
self-surrender 하는 주의 종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 고려파의 초창기
삶은 현실을 무시하는 듯한 저 건너편을 사모하는 내세주의적 삶(실제는 주님 곧 오실 것이니 현실을 무시하는
그런 교리를 믿은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비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주님만을 모두를 삼는 믿음이 있을
때에는 세상을 이기는 내공이 있었습니다. 계속 영적 무기로 계속 밀고 싸웠으면 됐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이긴 세상이 됐을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카이퍼리언적 정복사상이 전파되므로 인해
영적인 것 보다 잘못된 세상적 물질주의에로 빠지게 된 모습이 보여집니다. 세상 맛을 알게 되니 너무나 돈과
권력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면서 세상을 알다가 그만 호랑이에게
먹이 감이 된 형편이 됐습니다. 이제는 영적인 것 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우선이 됐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교회의 한 일원으로 다 같이 순결한 신부와 거룩한 성령이 함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 주님이 우리 기도 들으사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나라가 확립될 것입니다. 신부 된 우리의 마음을 정하게 하자! 이것이 새 해의 모토가 되었으면 하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됐으면 합니다. 아멘 (12월 14일 2015년)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