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칠목사 칼럼] 구주 탄생의 언약의 일관성
- 작성자 : HesedMoon
- 15-12-12 15:49
구주 탄생의 언약의 일관성(눅 1: 46-56; 삼상 2: 1-10) 오늘날 유대인들의 마음의 향수는 왕성했던 옛적 유대 왕국의 실현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유량했던 아브라함의 조상 보다 황금 빛 빛났던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했던 신정국의 다윗 왕조가 그리운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사건에서도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의 입에 자주 거명되는 이름이 다윗입니다. 성경적 여성을 살필 때도 다윗의 삶에서 나오는 여성을 다룰 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 이방 가나안 여인까지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다윗의” 아들이여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쳐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구주 탄생을 알리는 기사에서도 자주자주 다윗의 이름이 문맥에서 강조되어 나오는 것은 이상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여성 곧 마리아를 다룰 때에도 다윗의 노선에 따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임신 9 개월이 넘는 임신한 무거운 배를 갖고 그 임산부는 베들레헴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왜냐면 그곳이 다윗의 동네이고 마리아의 신랑이 다윗의 가문이고 혈통이기(ἐξ οἴκου καὶ πατριᾶς Δαυίδ , 눅 2: 4) 때문입니다. 왜 목자들이 그곳으로 서둘려 방문하려고 합니까? 왜냐면 천사들이 강조해서 다윗의 동네를 지시하여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1). 사실로 말해서 이 때에(신약 시대)는
옛 왕도 예루살렘의 영광은 사라지고 베들레헴 이름 뒤에 가리워져 있습니다(“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 눅 2: 4). 그러나 경건한 요셉과 마리아는 이
숨은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세상의 통치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호적
하라고 하였기에 고향 찾아 가지만 이들의 걸음거리를 지배하는 자는 가이사 보다 더 “권세있는 자”(눅 1: 52, 71,74)입니다.
그리고 그가 보낸 사자(=천사) 가브리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낳을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라”(눅 1: 32) 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곧장 산중에 있는 친족 엘리사벳에게 방문하니 그녀가 큰 소리로 “공적으로 선언을 해 주기를”(ἀνεφώνησεν , 1: 42) 믿은 여자가
복되고 태 중의 아이가 복되다고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임신 6 개월
된 세례 요한이 복중에서 기뻐 날뛰었습니다. 그 태아는 보지는 못해도 소리는 듣고 알아챘습니다(요즈음 태아는 생명이 아니라고 하니 마음대로 살상을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의 신앙으로 세례 받을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확인시켜 준 말씀이 큰 확신을 주었습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1: 45) 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가 전해 준 말씀을 그대로 믿고 “주의 계집 종이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1: 38) 라고 한 믿음과 행위를 두고 엘리사벳이 축복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임산 할 때가 가까워지니 마리아와 요셉이 이 곳으로 서둘러 가야 한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 걸음거리가
예루살렘이 세상사와 엮어지는 구속 사입니다. 그러니 저들의 움직임은 단지 다윗 왕족의 육신적 혈통 출생이기에 찾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높은 동기가 지배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약속하신 말씀과 관계해서 저들의 출생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저들은 고대 언약의 말씀이 지금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사라진 조상 다윗의 빈 보좌를 “그곳에서”(사도행전에서는
그곳이 성도들의 모이는 곳이 되고 있다)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다윗 왕가의 가문이 어디 있는 지 연속돼지 못하였는데 천사가 알려주고 엘리사벳이 같은 말로 선언해 주니 마리아는 믿음과 자아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한나의 노래에 모델을 삼았습니다. 눅 1: 46-55의 마리아 노래를 두고 성경 학자들이 마리아가 노래한 것이
아니고 훗날 누가 가 마리아 노래로 더 부쳐 놓았다고 하기도 하고, 노래 내용을 보면 마리아 같은 단순한
시골 처녀가 할 수 있는 노래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의 성태고지를 믿고는 “마리아가 가로되” 하면서 말씀대로 이루어 지이다고 하는가 하며(1: 38), 또 성령에 감동한 엘리사벳이 천사의 말 대로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라고 하면서 마리아가 성모
됨을 축하하는 말을 듣고는 마리아는 또 “마리아가 가로되”(: 46)
합니다. 이는 성령이 두 번이나 확신시켜주는 말을 듣고는 마리아가 얼마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확신하고 기뻐하는 태도입니다. 이 노래는 마리아가 엘리사벳 집에
3 개월 동안 머무는 동안(눅 1: 56)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에 감동하여 직접 노래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 말과 구절이 문자(文字)적으로나
주제(主題)적으로
구약과 일치하는 이유입니다. 그녀는 성령으로 감동됐다 하여 자기 감정 대로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구약) 말씀에
지배를 받았습니다. 필자는 마리아의 노래가 구속사적으로 모세의 노래(신 32) 와 한나의 노래(삼상 1:
1-12) 와 일맥상통함을 이미 보았지만(구속사적 성경해석, pp 194-200, 1986), 여기서는 마리아의 노래가
구약의 시편이며 선지 자들의 말에도 두루 섭렵하고 있음도 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노래는 구속사적 흐름에서
한나의 노래를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주의 어미 됨을 확신하고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합니다” 고 주를 찬양함이 시 103: 1-2, 22; 104: 1, 35 에
나옵니다만 마리아는 한나를 방면 교사로 삼고 있습니다. 둘 다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에게는 징벌하시는 면을 보여 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진실로 타락한 세상
사에서 신정 왕국의 구원 곧 메시야의 평화의 나라를 노래합니다(참조,
시 72). 한나의 마지막 말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요…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2: 10) 합니다. 한나는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자기 아들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리고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 어떻게 하시는 지를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사무엘의 평생
과업은 자기 백성을 개혁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자를 찾아 왕으로 기름 붓는 일이었습니다. 첫째는
사울에게 왕으로 기름 부었지만 그는 타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을 세워 하나님
백성에게 자기 법도를 가르치도록 하였고(참조, 시 51: 15) 그의 후손이 영영히 통치하도록 하였습니다(시89: 37). 한나의 마지막 말은 위대한 구원 자를, 한나 나 어미는
나를 뒤따르는 젊음 이에게 넘겨 준다는 심정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라” 라는 한나의 대망하는 말씀이 마리아에게는 이제 흘러가는 말이 아니라 현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눅 2: 49) 이 자기에게 일어날 줄이야 꿈도 꾸지 못한 일인데 지금 사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경이로움과 즐거움이
가슴에서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입니까? 성태
고지를 알리는 천사에게도 한 말이거니와(1: 38), 하나님에게도 아뢰는 신분은 “계집종”(δούλη
, 48; 삼상 1: 11; 창 29: 32; 30: 13)인데 이 낮은 자에게 하나님은 “내 구주”로 나타나심에 즐겁고 복되다고 소리 칩니다. 자기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절입니까? 로마의 황제며 그 분봉 왕 헤롯이 권세를 부리는 시대가 아니며, 로마 황제가 팔레스타인 지역은 반역하는 지역이라 하여 메시야적 사상과 접목하여 반동이 있을 가 하여 특별 군대를
파송하여 거리마다 관리하는 시대입니다. “겁탈과 강포” 가
설치는 시대,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는” 시대
같은 하박국 시대 같지 않으며?(합1: 2-4, 2: 1-4, 3:
16-19), 악인들이 득세하여 거룩하신 자를 대적하는 한나의 시대가 아닌가?(삼상 2: 1-10; 시 2 편). 시대가
다 권세주의자 부한 자들 대세로 흘러가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저들의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삼상 2: 8), “비천함”(ταπείνωσις , 눅 2: 48) )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그래서 한나도 엘리사벳도 마리아도
모두 기뻐했습니다(삼사2: 1; 합3: 18; 눅2: 47). 마리아에게는 “내 구주”로 자기에게 현실로 나타나니 그 즐거움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가 감히 다윗 왕가의 보좌를 이어 줄 수단이 되다니!!(눅 1: 27, 32). 그러니 비단 이스라엘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세대들이 “이제 후로는 만세에” 아니 “세대에서
세대로” 자기를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복되도다 고 칭송해 주는 것입니다(: 48, 50). 이렇게 되게 해 주시는 그 하나님이야 말로 거룩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을(: 49, 50) 더욱 알게 됩니다. 마리아는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사건들 –예컨데 긍휼하심과 징벌, 낮추심과 높이심 – 이 역사를 능력 있게 주도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역사의 리듬은 구약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시 9: 11; 삼상 2: 5, 7; 시 107: 9; 사 41: -9; 시
98: 3; 미 7: 20).
마리아의 시야는 더 넓어져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합니다. 여기에는
마리아에 관한 말은 없는 것 보면 자기 중심의 세상 보다 온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님(: 51-53), 그
다음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54-55). 그 신정 통치의 동사는 “행하시고”(Ἐποίησεν), “흩어시고”(διεσκόρπισεν), “내리치시며”(καθεῖλεν), “높이시고”(ὕψωσεν), “배불리시고”(ἐνέπλησεν), “공수로 보내시고”(ἐξαπέστειλεν), “도우시고”(ἀντελάβετο ), “말씀하시고”(ἐλάλησεν ). 이 동사들은 다 과거 형이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믿음으로 확신하는 선지적 과거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능력 있게 통치하시는 세계를 가슴에 안고
세상을 쳐다 봅니다. 특별히 마리아가 주목하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새옹지마입니다. 그 역사를 보면 시대 마다 강한 나라에 의하여 얼마나 낮아졌으며 비천에 처하였던가! 멀리로는 아브라함 족장들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유리하는 나그네로 얼마나 핍박을 받았으며, 다윗 왕가는 이미 꺾어진 둥지만 남았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그 둥지에서
새순이 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진작 새순이 돋아났지만 그 역경이 얼마나 컸던가? 그 후손 다윗의 자손이 그 본질은 만 왕의 왕이지만 그 출발부터 얼마나 낮아졌던가? 처녀 동정녀의 몸에서 임신하는 것이며 예루살렘이라고(명성은 사라지고) 불러지는 베들레헴의 가난한 말 구유에 태어나서는 33년 동안 지상의
삶에서 받은 수난이 얼마나 컸던가? 죽기까지 복종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그 태어난 아이가 바로 가브리엘 천사가 자기에게 예언한 말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 33) 하셨으니 이제 마리아는
확신 찬 어조로 그 노래를 끝맺고 있습니다(: 54-55). 고신의 영적 지도자 한 상동 목사님이 설교에서
자주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이 약속하시고 바로 천사가 약속하신 말씀대로 아이가 태어나실 것이라고
한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동일한 성경 구절에서 다윗의 위를 그에게 주어서 영원히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 하실 것이라고, 바로 앞에 말씀이 이루어졌으니 뒤에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는 지상의 천년 왕국에서 영원으로 인도되는 전천년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신앙으로 일제(日帝)의 무서운 고문도 이겼습니다(우리 옥중 성도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견해가 달라도 존경합니다) 마리아는 다윗을 넘어 자손의 기초를 놓은 아브라함 때까지 올라갑니다 한나의 노래 마지막 말 “기름 부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라”는 말을 마리아는 더욱 부각시켜 자기도 마지막에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조상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고
합니다. 자기와 태중의 아이가 다윗의 자손임을 확신하는 가운데 더욱 더 근본을 찾아 갑니다. 곧 조상 아브라함이 심히 갈망하였던 그 기초, 근본을 찾아 갑니다. 아브라함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니라”(히11: 10). 곧 한나가 “기름
부은 자”를 대망한 자가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위대한 후손의 시작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 자손이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여 다시 견고한 기초를 놓을 것이고 그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굳게 믿은 것입니다. 이
아이가 가브리엘이 성태 고지한 아이며 다윗의 후손이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세례 요한이 복중에서 기뻐한 이유를 마리아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예루살렘 궁궐에서 태어나야만 할 아이이지만 그 곳이 사라진 이상 이제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베들레헴 사관의 말 구유에 태어난 것입니다. 한나의 아들 사무엘이 이새의 목동들
가운데 목자를 데려오도록 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아이를 통해 자기 기쁘신 뜻을 온전히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다윗의
왕국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다윗의 확실한 은혜”(חַֽסְדֵ֥י דָוִ֖ד הַנֶּאֱמָנִֽים ,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 사 55: 3; τὰ ὅσια
Δαυὶδ τὰ πιστά. 다윗의 거룩하고 확실한 은혜, 행
13: 34)를 그 아이는 이루어 낼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비참한 현실 곧
착취당한 양떼들을 위해 역사할 것이며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되리니….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겔 34: 23, 24) 거기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이 거룩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거룩한 언약 곧 구주 탄생은 구약과 신약에서 일맥상통하게 하나입니다.+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