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칠목사] 15차 여행기
- 작성자 : HesedMoon
- 17-04-03 23:20
15 차 여행기 2017, 2. 9-16
(LA – 텍사스 Love Field 공항 -74798 S 4710 Rd Westville OK 74965 - Little Rock – 74798 S 4710 Rd Westville OK 74965 – Love Field 공항 -La Mirada, LA)
준비
뜻밖의 한 통의 전화
1월 18일 경에 휴스톤에 있는 배 전도사님 내외로부터 카토오 편지가 왔다. 자기들이 오크라호마 인디언 촌에 선교 가는데 목사님도 같이 가고 싶냐고 하는 말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아내와 의논을 하였다. 결론은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는 하는 일이 있어 3,4일 정도 하려고 하는데 아내는 이왕에 가는 김에 일주일 하자고 한다. 무던히 나를 위해 늘상 밥 해 주는 데서 자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14 차로 미국, 유럽, 한국 여행을 하였지만 우리가 차를 몰고 가는 여행이였기에 모든 것이 스스로 도전하는 경우였지만 이번에는 배 전도사님 내외가 우리를 초청하여 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passive 하게 저들이 하는 선교 사역을 쳐다 보고 즐기면 된다 싶어 일주일을 원하였다. 비록 저들에게는 짐이 되겠지만.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인디언 촌을 들려 보기는 하였지만 실지로 저들 촌에 들어가서 저들과 대화를 한 적은 없기에 또 새로운 도전으로 느껴졌고 또 전도사님 전화로 알려 주는 그 현지 소식을 자연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기도 하지만 인디언 모습과 감정이 꼭 한국 사람 같다고 한다. 이런 저런 호기심이 우리를 발동한 것이다. 그러나 계절이 겨울이라서 어언가 우리 육체는 LA 기후에 젖어 조그만 추워도 몸이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배전도사님에게 우리의 갈 의향을 말하니 당장 비행기 표를 끊는데 우리의 passport 사진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내가 아직 사진을 찍는 것을 찍을 수는 있지만 아직 보내는 방법을 모르기에 탈봇 신학교 김 목사에게 찾아 갔다. 알고 나니 쉬운 것인데 배전도사님이 카토오로 알려 주어도 내가 못 믿어워서 김 목사 도움을 받았다.
두 서너 시간 지나서 비행기 티켓이 내 카토오로 왔다. 세상이 참으로 쉽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내가 그런 것을 누릴 마음이 그렇게 의향이 별로 없이 거저 구 시대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사님 내외가 우리의 요청에 하등의 깎는 일 없이 “넵 목사님 좋습니다” 하는 답으로 일사처리로 진행된 것이다. Dr. 배 전도사님은 교육학 박사를 소지한 자이다. 나는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 2 차인 혹은 3 차 나의 “preaching tour”시에 한빛교회의 그의 전도사 사무실에서 만난 후 부터다. 그녀가 어디 전화가 왔는데 영어로 하는 데 아주 잘 하여서 말을 건넨 후부터 알게 되었고 그녀의 남편 배 (안수) 집사님도 알게 된 것이다. 별도록 그녀에 대한 말을 또 하겠지만 내가 그녀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교육한 박사학위도 물론 위대하지만 무엇보다도 한빛교회의 개척 당시부터 목사님들이 5 번이나 변하여도 그녀는 묵묵히 교회 어린이들이며 나이 많은 어른신들을 섬기면서 이민 교회 어린이들과 성도들의 애환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왔다는 점이다. 그녀는 한국인의 정서도 미국 문화도 다 잘 아는 자이다. 그런 그들이 우리를 초대하여 주니 마음 한 구석 고맙기도 하고 주께서 저들에게 우리를 위해 희생을 하는데 주님이 많이 많이 갚아 주시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티켓 사진)
전달훈 장로님 의사에게 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치 의사인 Dr. 전에게 가서 우리의 여행 계획을 알리고 필요한 폐렴 주사도 맞고 또한 내가 당뇨가 있으니 여러 약들을 미리 준비하였다. 전달훈 의사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탈봇 신학교에서 신학도 하신 무엇보다도 그의 인품이 겸손하고 환자들을 잘 진료해 주기에 우리는 이민 온 이후로 우리의 의사이다(6261 Satanton Ave Buena Park CA 90621; 714. 739. 4325). 아직도 더 살아서 주의 일 하고픈 것이다.
여행의 지렛데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와 주위 두 서너 목사님들에게 여행을 알려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곳에 아무리 수동적 자세로 간다 하지만 무슨 신앙적 푯대가 있어야 하는데 어느 말씀이 나를 지배할 가 하고 기도하였는데 우리 내외가 다니는 로뎀 장로교회에서 준비 찬송 중에 자주 부르는 찬송가 구절이 생각이 났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였다. 배전도사님이 귓띰해 주는 것은 모습은 한국 사람과 같은 데 온갖 미신이 많다고 하기에 요즈음 핑게될 것은 아니지만 기도가 약하기에 이 어둠의 권세를 사로잡는 하나님 보좌와 어린양의 피 권세를 믿고 가고 싶었다. 계시록의 말씀들이며 골로새서 정권을 잡고 계시는 주님 붙들고 가는 것이다.
목사에게는 말씀 전할 기회가 아름답다.
또 생각지 않은 여정이 또 생겼다. 우리를 초청한 배전도사님 내외가 저들 전도 여행 가운데 주일을 리틀라크에서 보내고 싶으니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내가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저들 교섭으로 2 일 지나서 전남수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행 계획을 내게 묻는다. 나는 이번 여행 계획은 잘 모르고 거저 따라 가서 보고 느끼고 함께 저들의 선교사역을 보고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2일 주일 말씀을 오전오후 전해 달라고 하였다. 사람 일이란 마지막처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전에 이 교회 방문이 7 번째 방문 때 이제 내 여기 방문이 마지막이 안 되겠냐고 했는데 이번에 전혀 예기치 않게 또 방문케 된다. 첫 방문 때도 내가 갈 입장이 아닌데 대타로 가게 되었고 이번에도 전도사님의 인디언 선교 여행에 내가 끼이게 된 것이다. 전목사님도 나도 베전도사님 내외도 다 사랑스럽게 서로 영접되어지는 방문이다. 그럴수록 나는 주여 이 교회와 사역자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이다. 이 마지막 때에 이민교회가 번창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세월에 비추어 장족의 발전을 하였기에 내가 더욱 발전하기를 마음이 쓰이기 때문이다. 이 교회와 사역자를 주님이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또한 내 마음 깊은 곳에 기도는 주여 배 전도사님 내외의 소명의 부르심이 명확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저들은 지금 저들 소명 확인을 주님께 응답받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저들 사역에 함께 즐기는 것이다. 이 번 우리 여행은 사전에 전혀 계획 된것이 아닌 특별한 선교여행이라는 점이다. 왜 이럴가 하는 것은 결과를 통해서 주님이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이웃 연세 많으신 사모님 -지금 88세이다-이 내 아내 보고 일주일 간이나 없으면 “내가 적적해서 어찌 하지?” 하는 우리 떠남을 아쉬워 하는 이웃이 있기에 그래도 세상에 그리워하는 성도를 붙어 주심에 감사한다. 정인석 목사님이며 성도들도 그렇다. 작은 교회가 참된 성도의 교제를 느끼는 모양이다.
삶의 지혜
집안을 깨끗이 정리해 두었다. 무엇보다도 어떤 화재의 위험 책임과 법률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몇 장 사진도 찍어 놓았다. 이제는 떠나면 된다.
2017. 1. 9(목)-첫째 날
지난 밤에는 이곳 앨에이에 또 비가 내렸다. 내가 4 년 차 이곳 앨에이에 살지만 이번만큼 비가 내린 적이 없다. 그래서 시 당국도 가뭄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지금까지의 가뭄에 대한 조처를 걷우어드린다고 하였다. 어쨌든 축축한 우리 아파트 길을 새벽에 걸으면서 약속한 정인석 목사님의 차를 기다린다. 새벽 5 시 반이지만 오는 길은 약간 막혔지만 소통은 잘되었기에 대략 6시 20분 경에 앨에이 공항에 도착하였다. 정목사와는 고맙다는 인사와 잘 다녀 오시라는 배웅으로 해어졌다. 그는 자기 선생에 대하여 깎듯시 사랑을 보여 준다. 기어히 안 받으려고 하는데 던지고 간다.
그제께 마침 앨에이에 어떤 개인적 사무가 있기에 배집사님이 왔더랬는데 우리가 밖에서 좌석 배정 티켓을 끊고 들어가니 생각지도 않게 배집사님이 우리를 알아보고 먼저 다가 오기에 놀랐다. 우리는 정말 이번 여행이 easy 하게 가게될 것 같다. 서로 반가히 만나서 커피 타임을 갖고 그간의 소식을 나눈다. 우리는 Alaska Airline 이기에 공항에 이 표시로 찾으려고 하였다면 우리는 헤메였을 것이다. 이 비행기가 아마 서로 조인트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 비행 노선은 Virgin Amenrican 으로 되어 있다고 배집사님이 알려 주었기에 망정이었다. 예상대로 배 집사님은 비행 탐승이고 내림에 모든 코스에 익숙하여서 우리는 졸졸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언제나 마지막이 될 수 있기에
우리가 우리 차로 여행하였기에 비행기는 미국에서 별로 타지 않았기에 또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이미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 지 모르기에 이번에는 큰 아들을 중심하여 자녀들에게 유언 비슷하게 몇 가지를 알려 두었다. 그 중에 하나는 무엇 보다도 우리 가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형제지간에 우애를 갖고 지내라고 하였다.
지난날 자동차 여행 길이 주마등처럼 되살아 난다.
생각 밖에 이 비행기가 국내선 치고 그렇게 작은 것은 아니기에 공중의 공기저항도 이기고 듬듬하게 갈 것같이 느껴졌지만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안개가 자욱 하여 약간 흔들거렸지만 거뜩히 하늘로 치솟았다. 비행을 하는 코스는 대략 지상에서는 아마 동서로 달리는 20 번 하이웨이 위도로 날라와서는 택사스에 약간 들어와서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달라스 Love Field 공항에 안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놀란 것은 비행 코스 가는 길을 내 앞에 있는 자막에서 중점 도시를 알려 주는 데 그 도시들이 우리가 다녔던 곳으로 이해되고 있다. 미쳐 도시 이름들을 잊고 있었는데 나오는 데 보니 우리가 그 곳을 지나쳤고 혹은 머물었고 이런 저런 기억들이 되살아 나는 것이다. 우리가 무던히 자동차로 많이 왕래하였구나. 우리 내외와 배 집사님과의 씨트는 건너편 조금 떨어진 뒷 좌석에 있었기에 대화는 할 수 없었지만 우리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왜 나이가 많으면 남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는 모양이다.
약 3 시간을 비행해서 Love Field 공항에 안착하였다.
달라스에 큰 공항이 하나 더 있지만 이 비행장은 주로 국내선 – Southwestern, Virgin American, Delta, 등 노선들이 사용한단다. 그러고 보니 많은 백인들이 보인다. 이들이 다 남부의 보수주의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부부는 키도 덩치도 큰 백인들이니 나는 더구나 왜소하게 보일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저들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런데 백인들이 많은 은사들을 받았으면 이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도를 늘상 받아 선하게 사용되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서틀 버스로 배 집사님이 자기 자동차 파킹해 둔 장소로 왔다. 파킹한 장소에 따라 서틀 버스 넘버도 달라서 기억해 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아니 주차 영수증이 있으니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수고까지는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차를 타는 순간에 이제 우리 집에 온 기분이다. 배 집사님은 우리 점심을 위해서와 약간의 쇼핑을 하기 위해 Plano에 있는 한국 H. Mart에 들렸다. 먼저 점심을 먹자고 나의 당뇨 사정을 알고 배려해 준다. 나는 돼지 갈비, 아내는 닭고기 불고기, 배집사님은 육게장을 먹었다. 물론 값은 배집사가 다 낸다. 우리가 먹으려면 허기를 면하는 정도의 싼 것을 고른다고 시간이 가는데 이 번에는 무슨 배짱인지 믿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은 것이다. 이 곳 음식은 양도 양이지만 맛이 좋고 많이 생각하고 음식을 만든 것 같다. 한인들이며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 오기에 잘 만들 것이라고 배 집사님은 말한다. 하옇튼 음식은 요즈음 맛으로 경쟁해야 할 것이다. 배가 고파서이기도 하겠지만 기름끼가 없이 잘 꾸어진 맛이다.
(왕푸 식당)
여기 H. Mart 에서 목적지까지는 우리가 중간에 쉰 것도 있어 밤 9 시에 도착하였으니 약 5 시간 만에 온 것이다. 북쪽으로 달려 오는 75 번 하이웨이 그 다음은 69 번으로 왔다가 밤에는 무슨 길인지는 몰라도 서북쪽 사이 시골 길을 거쳐 왔다. 오크라라마에 들어서니 거리 이름들이 인디언 이름들이 나온다, Atoka, 무스코키 …등 밤의 불빛에 나타나는 이름들이 스쳐지나는 것을 보면 오크라마는 인디언과 관계된 것이 많은가 보다고 느껴진다.
손자.손녀에게가문의 자부심을 갖도록
오면서 배 집사님과 나눈 대화들을 많이 나누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두 서너가지 있다. 첫째 우리 큰 아들 가족을 두 내외가 한국에서 만난 경험이 있는데 우리 며느리가 영어로 말하는 것이 더 자유롭다는 것에 놀랐다. 배 전도사님과 통하는 면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한국에 낳고 한국 사람 하고 함께 지났어도 어릴 때에 자란 감정이 미국적인 정서란다. 한국 말을 다 알아듣고 이해는 하지만 감정은 자랄 때에 느낀 감정이 서양적이란다. 우리 며느리가 한국 남편 그것도 경상도 남편과 함께 살면서 그리고 고답적인 씨아버지와 교통하면서 얼마나 그 정서가 어려웠을가 생각이 든다. 그 남편과 씨아버지 말과 행동을 이해는 하지만 그녀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나 싶지만 될가 하는 걱정이 생긴다. 요즈음 나는 며느리들에게 시집 온 지가 언제인데 자녀들이 박씨 가문의 자녀의 긍지로 키웠지 않으면 아직 시집 “왔다”고는 못할 것이다고 나는 보채고 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거저 할아버지로 손녀 손자들이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같이 이웃에 살아서 그렇지만 이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며느리들 책임이 크다고 느낀다. 마음씨 좋은 것과 가문을 지키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 나의 주장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다. 시집 “왔으면” 친정을 잊으라고 하였다. 우리 한국 옛 말에 친정과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고 한 말이 다 삶의 지혜에서 나온 말이라고 본다. 배 전도사의 씨아버지 가족과 친정 부모님이 다 미국에 왔는데 딸을 시집 보내고 나서는 서운할 정도로 친정 어머님이 발을 끊었단다. 되돌아 보니 친정 어머니에 대한 정은 끊을 수 없고 사랑스럽지만 어머님의 아량과 이해는 옛 말의 삶의 지혜에서 나온 것으로 존경스럽단다.
애비 없는 가정과 사회
둘째로, 한국 사회가 아버지 없는 세대로 이미 진입이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직장에 나가서 밤 늦게 돌아오니 자녀들은 아버지를 모르는 세대가 됐다는 것이다. 옛 말에 에비없는 자식이라는 것이 욕이다. 그래도 가정을 지켜 주는 아버지가 없어졌으니 아내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녀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를 지탱해 주는 기본 단위가 파괴 되어 가니 문제가 된다. 배 집사님은 그 년령 또래에 비해 아주 예리한 말들을 사건들 마다에 인사이트를 던져 준다. 그래서 나는 손녀 손자들에게 저녁 밥을 먹기 전에 꼭 아버지 한테 전화 걸어(교회에서 늦게 오니) 아빠 밥 먹었는지 인사하고 먹도록 가르치라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적어도 일반적 특히 오크라하마의 체러키 인디언에 대한 그의 예리한 사회적 심리학적 언저리를 분석해 주는 말은 인디언에 대한 이해를 하게 해 준다. 다음에 이 여행 마즈막 쯤에 가서 종힙적으로 하고 싶지만 하옇튼 인디언 선교가 쉽지 않다는 것이며, 문제는 근본적 구조를 깨뜨리고 접근하는 일이 아니고는 특히 성령이 임하지 읺고는 어렵다고 하였다.
Ray and Jean Chitwood 선교사 댁에 도착
밤 9 시 경에 -그러니 앨에이는 밤 7 시이다- 이것 체러키 인디언을 위하여 30년 넘게 아니 연관된 사역과 합하면 40년간을 이 인디어 족을 위해 사역해 오신 Ray and Jean Chitwood 선교사님 댁에 도착하였다. 미리 와 있는 배전도사님이 밤중에 나와서 우리를 반가히 맞아 준다. 기쁘다. 방으로 들어오니 선교사님 부인과 남편이 우리를 환영해 준다. 첫 인상은 우리가 알고 지낸 어느 교수와 비슷하다고 아내가 말한다. 저들이 준비한 간단한 저녁은 아주 올가닉하고 자연적인 음식이다. 선교사 와이프가 암 치료를 받고 있으니 철처히 건강식품을 먹고 있다고 한다. 내게 유익한 음식이다. 하늘을 날으단고 공중에서 비행기로 3 시간 그리고 땅에서 자동차로 5 시간을 왔으니, 대략 서로 아는 교제를 나누고 속히 잠 자리에 들어갔다.
(Ray 선교사의 사택과 그 뒷 끌에 여러 종류의 새들이 먹이를 먹이고 있다.)
2017. 2. 10(금)-둘째 날
아침 예배와 식사
우리가 여기 8 시 조금 넘어 잠을 깨니 배 전도사 부부와 선교사 부부가 이미 깨어 아침을 준비하여 밥상에 진열되어 있다. 먼저 저들이 간단히 아침 예배를 한다고 모인다. 셋 가족의 6 명과 또 이들과 함께 사역하고 있는 Sue Taylor 여사가 동참하였다. 이 여인은 캐냐에서 14 년 간 선교한 여종이다. 또 3월 15일에서 4월 17일간 캐야에 가서 선교 현장을 돌아보고 온단다. 다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어선 자이다. 이곳 선교사는 내 보다 4 살 많은 1937년 생이다. 이제 은퇴를 앞두고 후임자를 기도 중에 찿고 있다. 배전도사님 내외를 오랜 전부터 아는 사이라 자기들 대신에 이 선교사업을 맡아 달라고 한다. 아침 예배는 찬송가 영어로 어떻게 되어 있는 지 잊었고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 거듭나니… 이것은 나의 간증이요 이것은 나의 찬송일세” 시작하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저들 Good News Evangeistic Fellowship(GNEF) 을 위한 기도 제목들로 기도하였다.
마친 후에 아침 식사 가 풍성하다. 그러면서 아주 올가닉한 음식들이다. 서로 즐겁게 먹었고 이곳에 난방은 이곳에 널려있는 나무를 패어 가져온 땔감으로 난로에 상시로 넣으니 집안이 훈훈하다. 그런데 이 나무 땔감은 나무를 톱으로 켜서 2, 3년 드라이 해야먄 열기가 많고 숯이 까많게 된다고 한다. 도시 개스로 하는 것 보다 훈훈하고 향취가 난다. 옛적 신학 시절에 하도례 선교사님 댁에 자주 들렀을 때의 기분이 난다. 헤즈라 커피를 마시고 배 전도사와 아내 그리고 Sue 여사와 나는 이 Ray 선교사가 넗혀 놓은 지경을 산보 삼아 걷기로 하였다. 빙 둘러 보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렸을 것이다. 그만큼 넓고 또한 아름 답다. 왜냐면 아주 청명한 냇물(creek) 아니 여름에는 홍수가 날 때에는 큰 강물로 변하는 곳이란다. 그러기에 그 폭이 넓고 높다. 그러니 이 선교사의 현장은 천혜의 아름다움을 끼고 있다. 지금은 겨울이라서 잎이 다 떨어져 나무들만 서 있지만 여름이면 우렁찬 숲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있는 오솔 길로 가다 보면 많은 다랭이(wild onion)이며 야생 깻잎 등 먹을 수 있는 여러 Herb 들이며 열매들이 풍성하고 정말 아름답다고 한다. 낙엽 속에서 조금씩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여름이면 여러 종류의 자연산 먹을 거리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시냇물은 정말 맑고 깊다. 수영하러도 낚시하려도 온다고 한다., 지금 경치 좋은 곳을 잡아서 2, 3 년간 계속 자연을 배경한 예배실이며 풍류의 장을 계속 만들고 있다. 선교사는 현재 여기 꽃동산이며 예수님 삶의 발자취를 형상화 하려는 것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자연의 배경과 함께 멋진 관광지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이상하리 만큼 여름이라도 모기가 없단다. 옛적 카나다 어디 배타고 가서 폐광을 꽃동산 만들어 많은 관광객이 오는 모습이 연상 난다.
선한 일도 불법이나 덫에 걸릴 수 있는 사회다.
걸으면서 들은 말 하나는 전에도 여행 중에 들어서 여행기에 기록해 둔 것으로 기억나지만 여기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는 방법 하나는 법이란다. 사람이 편하기 위해 자연을 뜯어 고쳐서 만약 인재가 나면 그 고친자가 모든 법적 책임을 지지만 자연 그대로 두었는데 사고가 났다면 원 주인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방법이 되겠다.
지난 날 언제가 우리 시니어 아파트 촌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파트 오솔 길로 걷고 있는데 언제나 문을 열고 있으면서 밖을 쳐다 보고 있는 멕시칸 노인 한 여성이 소파에 엎어져 바닥에 누어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몸짐이 커서 내가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사무실에 급히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하니 큰 일군이 왔다. 내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녀를 도와 주라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I am not allowed to do it” 라고 한다. 그러면서 emergency 를 전화를 걸려고 하니 그녀는 벌럭 일어나서 소파에 앉는다. 글쎄 무엇 때문에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을가?! 미국 사회에서 무엇을 도와 달라고 하여도 조심해야겠다. 길에서 들어 누워서 이 주소로 태워 달라고 하여도 태워 주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는 사회가 됐다.
배 집사의 being 선교 사역을 위한 탐방 중의 하나
미국에는 여러 인디언 부족이 산재해 있는데 대략 큰 부족으로는 Chotaw, Kiowa, Creek, Navajo, 그리고 Cherokee 5 부족 이름이 들먹어진다고 한다. 미국에 살면서 이런 말이며 거리 이름들을 보았지만 이름이 이상하다 하였지만 인디언 부족의 이름인 줄 미쳐 몰랐던 것도 있다. 배집사 내외가 그가 속한 교회 학생들 수련회 장소로 몇번 왔기는 하였지만 이제 정식 자기들 소명의식을 갖고 이곳 저곳을 탐문하는 중에 이곳으로 오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 선교사 댁에서 아예 머물면서 저들의 채취를 느끼고 있다. 우리 내외는 이 배집사의 초청으로 와서 이 미국 선교사 집에 숙소와 밥을 제공받고 있다. 미국에 있는 한인 목사들이 혹시 여름 휴가차 온다면 다른데 숙소 배정을 받는데 우리가 이곳에 같이 공동 생활 하는 것은 배집사 내외 덕분이다. 저들이 자동치로 휴스톤에서 음식을 다 갖고 와서 우리가 아침 마다 먹는 토마도와 알몬드를 갈아서 주는 것도 잊지 않고 제공해 주고, 놀웨이에서 갖 잡아 온 살몬을 사서 가져 와서는 대접도 한다. 먹을 때 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이런 대접을 받나 싶을 정도다.
우리가 이곳 넓은 선교사의 개인 소유의 넓은 영역을-지금은 재단 이름으로 돼 있단다 - 우리가 돌아보고 오는 동안 남편 배집사님은 나이 많으신 미국 선교사 차량의 여러 부분들이 제대로 작동 안되는 부분을 고쳐 놓고, 그리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먼지가 가득 차인 연장실을 깔끔히 청소해 놓았다. 그리고 나무 캐는 연장 톱을 손질하고 있다. 이 선교사님은 자기가 오일 채인지를 사 놓고도 없는 줄 알고 있고 그래서 배집사가 두 통이나 사 왔다. 그러나 저 구석에 어디서 발견된 것이다. 연세가 많으면 물건이 제 자리에 없으면 없는 즐로 알지 조그만한 좌우로 쳐다 보면 있는 데 발견하지 못한다. 시야가 좁아진다. 그리고 만사가 그대로 두고 청소하려는 개혁의지가 약해진다. 그래서 여러 곳에 정리해야할 여러 부분들이 보이는 것이다. 배집사는 낫이며 연장 도구를 들고 사방을 정지 작업을 하면서 끝이 없는 일이란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든지 저들을 격려하고픈 것이다. You did great job for Indians here….Your being here with Indians for long times is great witness to the Gospel of Jesus Christ .
배 집사 내외와 우리가 발렌타인 만찬에 초대되었다
발렌타인 날에 앞서 오늘 저녁에 저들이 다니는 교우들과 함께 저녁 만찬을 하는데 우리가 초대되었다. 이 선교사 내외는 예쁜 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 “You are more beautiful lady rather than Danish ladies”(Jean 여사는 조상이 덴마크 조상의 핏줄을 얼마간 갖고 있기에 한 말이다), “Tonight you look like to be young gentleman”(정식 정장 양복 차림을 하고 있으니 젊게 보였다). 그 선교사님은 손을 들고 껑충 뛰고 즐거워 한다. 그의 입에는 “Praise the Lord” 가 끊어지지 아니한다.
어린애 같지만 40 년 넘게 고집스럽게 자기 일을 해 온 고집스럼은 있는 것 같다. 저녁 만찬을 먹고 나서 추첨을 하는데 빈 유리 병에 과자를 한 통 넣어 놓고 몇 개의 알 살탕이 있는지 알아 맞추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134 개 등 그런 것인데 나는 95개, 아내는 85 개로 썼다. 그런데 정답은 86개였다. 그래서 아내가 제일 큰 상을 탓다. 물론 그것을 배 전도사에게 주었지만요. 우리 경험적으로 보면 가끔 우리 주님은 이런 재미를 주어서 아내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 주는 것을 본다..
Tahelequah 시에 가서 체로키 인디언 박물관을 구경하다.
내일 토요일에는 리틀라크에 가기에 피곤하지만 배 집사 내외 권유로 오늘 오후에 가기로 하였다. 도착하니 유대인들이 미국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과는 달리 초라하고 아주 원시적으로 전시해 놓았다. 그나만 안의 뮤지움 전시들은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해 놓았기에 보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몇 개의 팜프렛도 역시 간다하다. 배집사님이 여기서 가족의 유산으로 남기라고 체로키 어어로 된 Amazing Grace 의 C.D 를 사 준다. 여기 체로키 족의 8 대손까지의 족보 책들이 보인다. 이런 것을 증명해 주는 증명이 있다면 미 연방 정부로부터 일년에 상당한 도움을 받기에 일을 안해도 산다고 한다. 그러나 인디언 DNA 를 가져도 이런 증명이 없으면 정부의 도움을 못 받는다고 한다. Bell 학교 교장이 자신이 그런 자라고 말하였다.
뮤지움 안에서 나와서 배 집사는 또 저들의 원시 집들을 구경시켜 준다고 티켓을 산다. 두 안내원이 반가히 맞이하는 데 한 사람은 인디언 같지만 한 사람은 거저 백인 같은 기분이 들지만 섞혔다고 한다.
위 왼쪽 홀은 인디언 회관 택이다. 어떤 중대사가 일어나면 여기 7 가문(clans)들이 모여 의논하는데 chief of war 와 chief of love 나누어져서 격론을 벌이는 데 어느 족이든 결정되면 그대로 한다고 한다. 배집사는 그의 설명을 듣고는 조선의 무관과 문관으로 나누어진 것과 같다고 하니 정말 정확한 비교라고 나는 말하였다.
이런 저런 역사적 설명들이 있지만 내가 다 읽을 수는 없었다. 한 가지 짚고 넝어가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 한국 역사나 교회사에 역사를 존중히 여겨 많은 족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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