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무 교수, 우리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4)
- 작성자 : HesedMoon
- 16-11-26 13:59
고신교회의 면모가 지난 70년 동안 마모되고 상실되고 있다.
개교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은 마치 별개의 학교인 양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신대원이 1998년 2학기에 천안으로 이전한 뒤, 두 기관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신학교로 시작한 대학교 안에 신대원 소속 신학교수들이 그 방향성이나 수월성 논의에 기여한 바가 많지 않고, 대학교와 병원이 개혁신학에 입각하여 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교정하는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현재 신대원은 목사 후보생을 양성하기 때문에 교단이나 목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대학교가 주는 학문적 유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목사는 다방면의 학문적 자극과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학문 분야들이 개혁전통에서 더 발전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
다른 분야와의 관계는 그렇다 하더라도 신대원과 대학교의 신학과와는 지금과는 다른 진정한 협력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대학의 위기는 동시에 신대원의 위기이다. 앞으로 대학에 등록하는 학생만 감소할 뿐만 아니라 신대원에 와서 공부하는 목사 후보생도 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신대학교 신학과와의 신학 연계 교육도 중요한 사안이다. 무엇보다도 신학과 교수들과 신대원 교수들이 함께 고신교회를 위하여 부름 받은 사명을 협력하여 수행해야 한다. 특히 신학서론을 위시하여 신학과 목회에 연관된 많은 주제들을 공동으로 연구하여 신학의 통일성을 교회를 위하여 제시할 때에, 설립취지서가 밝힌 취지를 살려 이 땅에 개혁신학에 입각한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5. 고신신학의 전망
지난 70년 동안 고신교회와 신학은 분명 고유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재는 그 고유성이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고신신학은 고신교회를 개혁신학으로 바로 세우는 사명을 지닌다. 이때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전통 특히 칼빈주의 신학을 말한다. 이 신학은 칼빈 신학을 이은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기초한 신학이며, 이후에는 네덜란드 개혁신학까지 포함한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고신신학은 종교개혁 전통과 개혁교회 전통을 잘 배워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고신교회라는 신학의 현장도 폭 넓게 이해해야 한다. 신학은 현장에서 나와 현장을 향한다. 고신신학은 고신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필요하고 유익한 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쳐야 하며, 현장에 들어가 신학을 전하고 현장의 질문과 문제를 안고 돌아와 새롭게 연구하고 신학을 정립하는 자립적이고 토착적인 신학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나아가 취지서도 밝히고 있는 대로 고신신학의 사명은 한국교회 전체를 향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 신학의 공교회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간 이런 고유성을 발휘하거나 발휘하지 못한 지난 70년을 거울로 삼아 개혁주의 한국교회 건설과 세계교회 건설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고신신학은 이처럼 현장에서 나와 현장을 향하면서 반성적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하여 기독교고전을 연구해야 한다.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부르짖지만, 총노회발회식 선언문에서 언급한 “우리의 선배 칼빈”도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였다. 고신신학이 자립하려면 종교개혁자는 물론 고대교회의 교부까지 연구하는 공교회성을 확보해야 한다. 부흥한 교회가 기독교고전을 생산하였다. 그런데 이런 교회도 쇠퇴하고 교회당은 비어갔던 역사적 교훈을 직시하면서 현재의 한국교회가 이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신학적인 경고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역성장하는 시점에서 이전의 성장과 부흥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담은 신학적 분석과 대안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고신신학은 이 점에서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개혁신학의 면모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고신신학은 이 땅에서 교회가 서구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고 건강하게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개혁신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이런 신학만이 아르미니안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흐름을 비판하고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고전연구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연구 및 교육도 포함한다.
이제는 이런 신학을 확립하여 우리에게 신학적,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서구교회에게 진 빚을 갚을 때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신교회에 개혁신학을 전해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및 정통장로교회와의 관계는 일찍 요원해지고 말았다. 송도의 신학교 첫 교사 건축에 재정적 도움을 준 미국 기독개혁교회, 두 번째 교사 건축에 재정적 도움을 주었고 신학교수 요원들을 훈련시켜준 네덜란드 개혁교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가고 있다. 이제는 이 교회들과 신학교에게 빚을 갚을 보은의 때이다. 이미 세속화된 서구 세계에서 외로운 믿음의 투쟁을 하고 있는 이들이 이렇게 성숙한 고신신학과 고신교회의 보은과 도움을 받으면 크게 힘을 얻을 것이다. 자유자만이 종이 될 수 있듯(고전 9:19), 신학적 자립을 한 교회만이 이웃 교회들을 섬길 수 있다. 이것은 개혁주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의 중요한 방편이기도 하다.
건강한 개혁신학은 진정한 회개 위에 가능하다.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에서 고신교회가 개혁하려고 했던 점들이 이제는 고신교회 안에서도 다반사가 되어버렸고, 우리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사이비한 복음주의, 허울 좋은 보수주의,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까지 사랑하여 달라는 화평론과 타협정신이 교권을 타고서 (고신)교회 속에 들어왔고, 교회를 현세생활처세의 도구로 삼고 말았다.” 이처럼 괄호 속에 ‘고신’을 넣을 정도가 되었다면, 과연 고신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고신교회를 축출하였던 당시의 한국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면 고신교회가 굳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있겠는가? 고신교회의 존속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려면, 목회에서부터 개혁하고 인간의 욕심과 죄로 물든 현실을 수용하는 타협을 거부해야 하며, 교권을 애초부터 형성하지 말아야 하고, 목사든 교인이든 교회를 처세의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 고신교회는 한국교회를 개혁하도록 주께서 이땅에 베푸신 선물이다. 이 원래 사명과 목적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때로는 바리새주의나 분리주의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고신교회는 교회와 세상을 개혁해야 할 것이다. 비록 이런 비난이 사실무근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키우고 인재를 중시하여 편협함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고신교회의 전망이다.
우리에게 텍스트는 성경뿐이다. 우리의 콘텍스트는 지금 이 한국땅이다. 지난 세월 2천년의 교회사는 우리에게 참고일 따름이다. 오직 성경에서 고신교회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이것이 고신신학과 교회의 첫 고백이다. 주께서 우리를 파송하여 세우신 이 땅에서 지금 우리는 교회사를 참고하면서 새로운 기독교고전을 창출하자.
“한국인들은 철학할 때는 불교인이 되고, 예를 갖출 때는 유교인이 되며, 생의 위기가 올 때는 샤머니스트가 된다.”
이렇게 오염되고 타락한 한국인의 심성을 고치는 고신교회의 개혁신앙과 개혁신학이야말로 이 땅의 참 소망이요 진정한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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