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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국 제1호 여자 목사 - 오애은 목사

  • 작성자 : 4
  • 12-06-30 02:48

중국 제1호 여자 목사

오애은 목사

중국 심양시 서탑교회


요령성 심양의 서탑에 있는 서탑교회를 섬기고 있는 오애은 목사를 만났다. 15년 동안 중국을 방문하면서 그의 삶을 듣고 싶었던 참에 이번 기회에 시간을 내어 주셨다. 서탑교회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에게 고향과 같은 교회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여 왔다.


오 목사님 건강은 요즘 건강은 어떻하십니까?
이제 제 나이 84세이니 건강하다고 하나 많이 힘이 듭니다.


목사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중국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의 부친이 북조선 선천에서 미국 선교사가 세운 미동 병원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마침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일본헌병에 쫓기게 되어 저의 큰 언니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 요령성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가 요령성에서 태어 났습니다. 이 교회가 1913년에 설립되었고 전 14살에 장춘에서 심양으로 와서 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평생 이 서탑교회에만 출석하였습니다. 한 교회에서 70년을 섬겼습니다.


문화 혁명 즉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목사님은 어떻게 지나겼습니까?
문화 혁명 당시에는 모든 교회는 폐쇄되고 목사 전도사 등 교회지도자는 잡혀가서 중노동도 하고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도 역시 그 기간동안 한 10년 중노동을 하며 갖은 고생을 하다가 1979년에 회복될 때 풀려 나왔습니다.


목사님 안수는 언제 받으셨습니까?
1981년 서탑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때는 장로교에는 여자 목사가 없어서 못받다가 1980년도 중국 기독교 협회 총회에서 헌법을 수정하고 1981년 4월에 안수를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여자 목사로 제1기로 안수 받았습니다. 지금은 중국에 여자 목사가 많습니다.


안수 받으신 후에 몇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까?
380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목사님 한평생 사역하여 오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어느 때 였습니까?
역시 문화 혁명 때였습니다. 교회는 폐쇄되어 예배는 드릴 수 없었고 교인들은 모두 뿔뿔히 헤어지고 서로 만날 수 도 없었던 때가 정말 가장 마음 아프고 힘들 때 었습니다. 비록 10년간 문화혁명기간이었으나 즉시 회복되지 못하다가 2,3년도 더 있다가 이곳에서는 회복되었습니다.

가장 기뻤을 때는 역시 교회를 회복할 때였지요. 그 기쁨은 누구도 짐작 못할 거예요 1980년 9월 당시 교회 건물은 고무 공장으로 사용하다고 돌려 주었습니다. 시커먼 먼지가 가득찬 공장건물을 받고 너무 기뻣습니다. 처음 회복 되었을 때는 회복 되었으나 모두 무서워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나오지 못하고 여자 분들이 한 20명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애은 목사: 장로님도 이 서탑교회에 오신지 오래되었지요?
이윤태 장로: 제가 처음 서탑교회를 방문하였을 때가 1992년도였습니다. 이 새로지은 교회 건물이 완공 되기 전이지요.
오애은 목사: 제가 기억하기에는 1995년 성경구절이 담긴 달력을 기억하는 데 조선 골동품에다가 성경구절이 담긴 달력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무 귀한 달력이였습니다.
이윤태 장로: 18년전에 이 교회를 방문하기 시작하여 선교용 달력을 가지고 온 것이 15년째가 됩니다.

오애은 목사님은 1980년부터 15년간 상임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중국교회를 섬겼으며 서탑교회의 현재 교세는 1500명의 교인이 출석하고 있으며 약 150여명의 목회자가 본교회에서 배출되었다.가장 영향력을 가지신 오 목사는 동북 신학교 조선족신학교를 다시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가 한국에서 신학을 졸업한 사람은 인정하지 않아서 부득이 조선족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걸어오신 발걸음이 거름이 되어 중국을 복음화 시킬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여 오랫동안 주의 일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담·정리 이윤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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