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사 열전] 1- 들어가는 말
- 작성자 : Henry Park
- 19-06-29 11:32
최근 크리스찬 타임즈에 주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이란 제목으로
글을 연재 중인 박흥배 목사입니다. 글 솜씨가 미천하여 많이 망설였으나
이윤태 장로님과 몇몇 동료 목사님들의 권유로 총회 게시판까지 올리려 합니다.
수정 내지 보완할 점이 있을 경우 언제든 알려 주십시오.
박흥배
구 조선, 구한 말 미국 선교사 열전
들어가는 말
크리스찬타임스에 주 조선과 구한 말 미국 선교사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게 됨을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연재할 기회를 주신 평소 존경해 오던 이윤태 발행인께 또한 감사를 드린다.
이윤태 발행인은 필자에게 수 차례 위의 제목으로 크리스찬 타임스에 연재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필자는 문장력이 짧음을
핑계로 지금까지 사양해 왔었다. 근데 왜 이제와서 생각이 바뀌었냐고 질문할 지 모르겠다.
물론 집필해야 겠다는 생각이 바뀐 계기가 있긴하다. 2018년 7월 하순, 필자는 중한 병으로 인해 병원에 6주간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자택에서 요양 중 우연히 인터넷으로 TVN 방송의 ‘미스터 선샤인’을 시청하게 되었다. 방송 초기 몇 편에
알렌 선교사가 등장한다. 근데 극 중 내용에서 알렌 선교사를 심히 왜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은연 중 반기독교적 시각을
드러내는 작가의 태도는 충격을 넘어 심히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물론 방송사와 작가는 교묘히 빠져 나갈 구멍은 만들어
놓았다.(본 드라마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라고..) 아무리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역사 드라마지만 이것은
너무나 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고, 그 결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미국 선교사님들의 행적에 대하여 미력하나마 신문에
연재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 먼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연재 할 글들은 논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글들은 필자 나름의
연구와 조사의 결과물일 뿐 아니라, 여러 학자들과 저자들의 견해들을 인용할 수도 있다. 신문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풀어
나가는 글들이기에 각주 나 미주를 생략할 수 밖에 없고 또한 특정인들의 주장이나 반론을 인용할 때 그들의 이름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연재 말미에 한국의 여러 기독교 사학자들에 대한 제 나름의 평가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한 수많은 미국 선교사님들 중 한국 기독교계에 깊은 영향을 끼치신 분들 중심으로 연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1884년~1910년 사이에 활동하신 분들을 중심으로 다루려 한다. 편의상 필자는 이 분들을 The First
Generation of American Missionaries in Korea로 구분하고 부른다. 이에 더하여 필자는 오하이오주 (Ohio) 톨레도시
(Toledo)를 중심하여 자동차로 반경 5시간 내의 출신 선교사를 먼저 찾아 소개하려 한다.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
선교사님들은 다음과 같다.
최초의 공식 선교사인 호레이스 알렌(안련安連)Horace N. Allen 선교사, 평양 장로교 신학교 설립자이며 조선 야소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 한 새뮤얼 모펫(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선교사, 이승만 대통령, 이상재 선생등을
전도하고 예수믿게 만든 달젤 벙커(빙거房巨)Dallzell A. Bunker 선교사, 오랜 기간의 중국선교를 마치고 마지막 4년을
조선에 와서 최초의 문서선교에 이바지한 프랭크린 올링거 Franklin Ohlinger 선교사, 마포 삼열 선교사와 같이 평양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북 전역을 복음화하는데 앞장섰던 그래함 리(이길함) Graham Lee 선교사,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시무한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초대목사로 시무한 찰스 번하이저(편하설片夏薛) Charles F Berheisel 선교사, 백정들을
평민으로 만드는데 앞장섰으며 승동교회를 개척, 시무한 새뮤얼 무어(모삼열牟三 悅) Samuel F Moor 선교사, 알렌
선교사와 헤론 선교사에 이어 제중원 3대 원장으로, 세브란스 병원 초대 원장으로 수고한 올리버 에비슨( 어비신,魚丕信)
Oliver R. Avison 선교사, 최초의 장로교 공식 목사 선교사로 부임하고 새문안 교회를 시무하다가 풍토병으로 숨진 다니엘
기포드 (기보奇普) Daniel L. Gifford 선교사, 오늘날 양화진 외국 선교사 묘지가 있게 한 조선에서 최초로 숨진 제중원 2대
원장 의사였던 존 헤 론(惠論)선교사, 조선에 최초로 사과 묘목을 가지고 왔으며 많은 한국적 찬송가를 작사, 작곡했을뿐
아니라, 평양신학교 설립에 관여한 스왈런(소안론蘇安論) William L. Swallen 선교사, 마포삼열 선교사, 변하설 선교사와
함께 하노버 대학 트리오(Hanover Trio)로 불리우며 경상도 선교에 결정적 이바지했던 윌리암 베어드 William M. Baird
(배 위량裵偉良) 선교사 등등..
필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2015년 여름 오하이오주 톨레도시 인근 왈브릿지 빌리지에 소재한 왈브릿지 초등학교 건물을
인수하고 난 후 여러 교역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KPM 소속 박신호 선교사도 그들 중 한분이다.
박신호 선교사의 도전적(?) 질문을 필자는 평생 잊지 못 할 뿐 아니라 그 질문 후의 내 삶이 바뀌었다. “박 목사님, 지난
130 년간 한국을 거쳐간 미국 선교사님들이 몇 분 정도 되시는 줄 아십니까?” 위의 질문을 받고 나는 저으기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질문을 받은 것도 처음이려니와 부끄럽게도 한 번도 거기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심 400~500명은 되려는가 하고 생각한 후 “글쎄요 500~600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박신호 선교사의 답은 심히 충격적이었다. “2000여 명 됩니다.” 그 질문 후 부터 필자는 조선과 한국을 거쳐간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발자취를(특히 오하이오주를 중심으로) 계속적으로 찾게 되었다. 그들의 발자취를 찾는 동안 그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친 몇몇 분들을 추가적으로 찾게된 것도 필자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 되기도 하였다.
그 몇몇 분들은 다음과 같다. 학생자원운동(Volunteer Student Movement for Foreign Mission)을 통하여 해외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디 선생 (D.L. Moody), 남북전쟁 이후 경제부흥으로 인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 하고 그 쌓은 부를
해외 선교에 아낌 없이 기부 내지 헌금한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장로와 맥코믹 장로(Cyrus McCormick) 부부,
멕코믹 신학교 학장을 역임하는 동안 수많은 신학생들에게 선교의 열정을 불어 넣고 자신 역시 해외 선교사로 조선으로
가려 했던 크레이그(Dr. Willis Craig) 박사, 획기적인 선교정책을 세우고 그 선교정책을 조선에서 실천하게 했던 네비우스(Nevius) 선교사
등등..
위의 다섯 분을 먼저 소개하고 난 후 본격적인 초기 미국 선교 사들의 열정, 헌신, 희생 등을 소개하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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