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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한국선교사 열전] 48-2 Charles F. Bernheisel(편하설) 선교사 ②


Charles F. Bernheisel(편하설) 선교사- 1900년 입국

1902년 2월 20일, 편하설(Charles Francis Bernheisel, 片夏薛, 1874-1958)의 일기,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신다”

평양에서 태어난 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내가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만 전혀 일을 하지 못하게 제한받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교회, 특히 목사와 전도사가 모두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교인들을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저들(일본)은 어떻게든 나와 교회 관계를 떼어 놓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안타깝게도 편하설 선교사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편하설 선교사 는 그로부터 2년 후 한국 땅을 쫓기 듯 떠나야 했다.

결국 패망한 것은 일본제국과 그 편에 서서 추한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던 교권주의자들이었고, 편하설 선교사가 혼신을

다해 지키고자 했던 산정현교회와 순교자들은 아름다운 명성을 두고두고 떨치는 승리자가 되었다. 그가 한국에 심고 키워낸

영적인 후손들은 ‘선교사 편하설 가문’으로 지금껏 무럭무럭 번창하는 중이다.

1900년대 평양 장대현교회는 부흥이 이어지면서 분립개척도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1906년 1월 26일 산정재 또는 산정현

이라 불리는 언덕, 평양시 계리 55번지에 분립개척한 평양제4교회가 바로 산정현교회이다.

초대 담임목사는 찰스 번하이젤(Charles F. Bernheisel), 한국 이름으로는 편하설 선교사였다. 편하설 선교사는 2대 한승곤

목사가 그 사역을 이을 때까지 산정현교회를 담임했으며, 시무사임한 후에도 한동안 협동목사로 섬기면서 교회를 든든히

지켜주었다.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만세운동을  평양에서 주도했던 이가 바로 당시 산정현교회 3대

담임목사이었던 강규찬 목사이다. 105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를 정도로 민족을 사랑한 강규찬 목사가 만세운동으로

다시 수감되었을 때, 편하설 선교사는 대신 산정현교회 설교를 맡아 교회를 감싸 안으며 위로해주었다. 그의 위로는 산정현

교회 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만세운동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붙잡혀 고초를 당하던 조선땅 전체를 위로했다.

고난당하는 조선 교회 곁에서 편하설 선교사는 든든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1936년 산정현교회 6대 담임목사로 주기철 목사가 부임했다. 이후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주기철

목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순결한 신앙을 지키다가 결국 1944년 순교한다. 산정현교회가 순교 직전까지

주기철 목사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편하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지고 꾸준히 유지된 신앙적 전통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주기철 목사가 투옥되어 있던 기간에도 편하설 선교사는 산정현교회 강단을 지켜냈다. 이 임무 또한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본경찰은 그의 설교를 막기 위해 온갖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편하설 선교사는 굴하지 않고

강단에 섰다. 설교 직후 경찰에 소환되고, ‘다시 한 번 설교하면 체포나 추방’이라고 협박까지 받았지만 편하설 선교사는

목자 잃은 교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용기있게 행동했다. 사실 일본 경찰이 집요하게 편하설 선교사의 설교를

막으려했던 것은 산정현교회에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목사를 세우려는 의도였음을 편하설 선교사는 알아채고 있었다.

교회를 절대로 일본의 손아귀에 넘겨줄 수 없었기에 편하설 선교사는 순교하는 마음으로 강단을 지켜낸 것이다. 그런데

편하설 선교사에 압력을 가한 것은 일본 경찰만이 아니었다. 주기철 목사를 면직했던 평양노회까지 부끄럽게도 편하설

선교사를 압박하고 나섰다. 1940년 3월 4일 노회가 그에게 보낸 공문은 ‘특별위원회가 전권을 갖고 있으므로 산정현

교회와의 관계를 끊으라’ 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편하설 선교사는 분명한 목회자요, 신앙인으로서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편하설 선교사는 교육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03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도덕학, 성서지리, 수학 등을가르쳤다. 그리고

1912년부터 1929년까지는 숭실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전임교수 역할을 했다. 산정현교회 사역의 짐을 벗은 이후의

일이다.

그 뿐 아니라 다른 재미있는 기록들도 남아있다. 편하설 선교사가 10여 년간 평양 인근 산골마을들에 당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순회전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의 열정을 가진 선교사였다. 당나귀 위에 앉아서도 조선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문공부를 했다고 전해지니. 선교사로서 그의 사명감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엿볼 수 있다.

27살의 젊음과 패기를 가지고 1900년 10월 가을에 한국을 처음 찾은 편하설 선교사는 67세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떠밀려 나갈 때까지 생명을 담보하며, 한국교회와 산정현교회를사랑으로 지켜낸 고마운 미국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리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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