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13. 한상동 목사와 초량교회와 삼일교회, 총회의 명도 요구
- 작성자 : 나삼진
- 22-02-26 21:29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13. 한상동 목사와 초량교회와 삼일교회, 총회의 명도 요구
해방과 함께 8월 17일 평양감옥에서 풀려난 출옥성도들은 6년간의 옥고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건강의 회복과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한 달 동안 기도회를 가졌고, 9월 20일 다섯 개 항의 교회쇄신방안을 발표했다. 이때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의 상징성이 컸던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아 주기철 목사를 이어 담임목사가 되었고, 문창교회와 산정현교회를 대를 이어 목회하면서 영적인 계승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산정현교회 목회는 오래지 못했는데, 어머니 배봉애 님의 부고가 날아들어 1946년 4월 남하하였기 때문이었다. 부산에 내려온 한상동 목사는 삼팔선이 강화되면서 북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대한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옥중구상을 실현할 준비를 하던 중에, 6월 중순 제1회 남부총회(제32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인가하면서, 긴급히 신학교 개교를 준비하였다. 7월에는 강도사로 시무했던 초량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회하였다.
1946년 6월 63명이 등록한 가운데 예비과정으로 ‘진해 신학강좌’를 열었고 9월 20일 고려신학교를 개교,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의 신학 전통을 잇는 신학교육으로 한국교회 쇄신운동이 발화되었다.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을 배출한 경남노회는 제46회 임시노회에서 이를 인가하고 지원을 결의했다. 그러나 친일교권주의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아 고려신학교 인가와 취소가 반복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평신도들의 강력한 지지가 따랐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사흘만에 서울이 점령되었고, 두 달 만에 낙동강 이남을 제외하고는 전국이 인민군의 점령지가 되었다. 전쟁을 피해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부산지역 교회들은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는데, 초량교회에는 많은 피난민 교역자들이 모여 교회는 그들을 구호해야 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초량교회에서 교역자 부흥회를 가졌고, 참석자들은 성령의 큰 은혜를 체험하였다. 특히 피난민 교역자들은 나라를 위해 집중적인 기도를 했고, 그 결과 국제연합이 참전을 결정하면서 9월 28일 맥아드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성도들은 이를 회개와 눈물의 기도의 결과로 인식하였다. 당시 교계의 대표 논객 김린서는 한국교회가 ‘고래배(고려파)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했을 정도였다.
해방 후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약신, 한명동, 남영환 목사 등은 각지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해 강력한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고, 민족적인 재난 앞에서 철저히 통회했다. 또 제주민들과 피난민들을 위한 제주집회를 한상동, 박윤선, 이학인 목사가 인도하였는데, 한 주간 예정의 제주집회는 한림읍과 서귀포읍에서도 요청이 있어 삼 주가 더 걸렸을 정도였다. 마두원 선교사 등은 포로수용소 예배와 성경공부를 인도하였다.
한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강점기의 교회 훼절과 범죄에 대해 회개를 외치던 교회쇄신운동을 거부하고, 제33회(1947) 총회에서는 고려신학교가 총회와 관련이 없음을 천명하였고, 제35회(1949) 총회를 앞두고 친일교권주의자들이 불법으로 경남노회를 분리해 나갔으며, 경남노회는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 ‘경남(법통)노회’라 했다. 제35회 총회에서 경남노회 문제 처리를 위해 전권위원회가 파송되었다. 전권위원들은 노회와 공식적인 회합 없이 노회를 삼분하는 등 부당한 결의를 하면서 제36회 총회에서 전권위원의 보고를 기각하였다. 제36회 총회가 혼란에 빠져 정회하였다가, 전쟁으로 인해 이듬해 속회 총회를 개최했는데, 경남(법통)노회 총대 입장권을 발부하지 않으면서 총회에서 추방하였다.
한국전쟁 기간에 부산은 임시 수도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미 8군이나, 공관에 가까웠던 부민교회에서 여러 차례 예배를 드렸다. 그는 1951년 4월 마지막 주일에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했고,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직전 주일에도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해 그 결단에 영향을 미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으로 고려신학교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대구 서문교회 명신홍 목사는 오병세, 김주오, 박복달 등을 고려신학교에 추천하였고, 자신도 교수로 간다고 했었지만, 제37회 총회 이후 태도를 돌변해 경북노회장으로서 총회와 노회의 결의를 앞장서 집행하였고, 이듬해 총회장이 되었다. 서문교회는 김주오 등 고려신학교 재학생 5명을 제명했고,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서문로교회를 시작하였다. 서문교회에서 서문로교회, 대구제일교회에서 성동(당시 성남)교회, 김해읍교회에서 김해중앙교회가 1951년 전후해 설립되었다.
총회의 결정 후 총회와 경남노회 유지재단(이사장 김석진)은 경남의 대표적인 교회였던 초량(한상동), 문창(송상석), 영도(박손혁), 거창(주남선), 진주교회(황철도) 등 다섯 교회에 명도 요구 소장을 보내었고, 9월 23일에는 초량교회를 접수하기 위해 위원을 보내 강단을 점령했다.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며 예배했고, 총회 측에서 계획한 예배는 드려지지 못했다. 한상동 목사는 교회분쟁이 이웃에 덕이 되지 않을 것을 염려해 세 주간의 말미를 줄 것을 요청하고, 10월 14일 송별예배를 드리고 은혜로운 교회 분리가 이루어졌다. 긴급히 임시 예배당을 건축하고 90% 이상의 성도들이 지지하던 가운데 한상동 목사는 역사성있는 초량교회를 떠나 주일 저녁에 주영문 장로의 뜰에 임시로 건축한 96평 건물에서 삼일교회가 설립되었다.
노회의 교회 명도 요구는 초량교회와는 달리 고신 지지자들이 절대적이었던 (제일)영도교회, 거창교회, 진주교회는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고, 문창교회는 소송으로 대법원까지 가면서 법정소송의 상징이 되었으며, 송상석 목사의 법정소송 논쟁으로 훗날 박윤선 교장이 고신을 떠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제일)영도교회는 계속하여 고신교회로 있었지만 재산은 통합측 유지재단에 속해 있었는데, 1995년에야 통합측 유지재단으로부터 재산을 양도받아 오랜 숙제가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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