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12.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와 3부자 순교(1948/1950)
- 작성자 : 나삼진
- 22-02-26 21:25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12.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와 3부자 순교(1948/1950)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쟁과 전쟁으로 얼룩진 사사시대에 아름다운 구원의 이야기 룻기를 만난다. 그와 같이 해방 후 한국교회 쇄신운동 과정에서 장로교 총회를 장악한 친일교권주의자들의 압제와 중도파들의 우유부단함 속에서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목사 등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운동이 전개되었고, 여순사건과 한국전쟁기에 손양원 목사 삼부자의 순교의 꽃을 피워내었다. 이는 한국교회 140년 역사 가운데 세계교회에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이다.
손양원 목사는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여 5년 이상 옥고를 치루었고, 해방과 함께 출옥 후 여수 애양원교회로 복귀해 목회를 계속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 때 아들 동인과 동신이 순교했으며,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아 원수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 자신도 1950년 9월 한국전쟁 초기에 순교하면서 한국교회의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전기 ‘사랑의 원자탄’은 1977년에 이미 11판이 출간되었고, 미국, 영국, 독일, 태국,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등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함께 옥고를 치룬 한상동 목사의 옥중구상이었던 신학교 설립을 통한 목회자 양성에 찬동하고,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 설립 당시 기성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설립자들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잇기 위해 중국에 체류하던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내정하고 박윤선 교수를 교장 서리로 해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고신교회는 송상석 목사를 보내 목숨을 걸고 만주에 있던 박형룡 박사를 국내로 인도해 교장에 취임했지만, 그는 한 학기 만에 고신을 떠났다. 이에 1948년 5월 박윤선 교장 취임과 함께 손양원 목사가 총무로 취임해 생애 순교 때까지 고려신학교를 위해 마지막 귀한 봉사를 했다. 한명동 목사는 손양원 목사를 두고 “고려신학교의 초창기에 총무를 맡아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한부선 선교사, 박윤선 목사와 같이 오늘의 고려신학교의 기초를 닦은 역사적 인물”이라 평가했다.
손양원 목사(1902-1950)는 대한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절, 경남 함안에서 독실한 그리스도인 손동일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고학을 하며 중등교육을 받았고, 귀국해 경남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더 깊은 신학 공부를 위해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남지역 순회전도사를 거쳐 여수 애양원 나환자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엄혹한 시절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되어 6년간 옥고를 치루었던 애국지사로, 해방 후 전국교회를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며 교회 쇄신운동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총회 측과 갈등할 때 그는 고려신학교 당국자로서 교권주의자들의 강압적 행위를 항의하였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심각했는데, 여수순천사건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를 제주로 파견하려 했으나 남로당 계열의 군인들 2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켰고, 8일 동안 치안의 공백이 있었다. 이때 순천사범학교를 다니던 동인이 체포되었고, 그를 처형하려던 때에 동생 동신이 형 대신 죽겠다고 나서면서 악질 반동분자로 지목되어 150명이 죽었을 때 함께 순교당했다. 1948년 10월 21일의 일이었다. 치안이 확보된 후에는 좌익에 협력했던 2,500명이 군인에 의해 또다시 죽음을 당하였다.
그때 손양원 목사의 ‘여덟 가지 감사’가 유명하고, 두 아들을 죽였던 안재선을 죽음에서 구해내고, 그를 양아들로 삼았는데, 이를 두고 전기작가는 그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렀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함께 잃은 절박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드러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이 사흘만에 서울을, 파죽지세로 여수까지 진주하면서 손양원 목사도 피난을 위해 배에 올랐지만, 성도들을 생각해 되돌아가 교회를 지키다가 인민군에게 체포, 순천으로 이동 중 1950년 9월 28일 여수 미평 과수원에서 퇴각하는 인민군의 총살로 순교했다.
손양원 목사가 순교했을 때 가족들은 가매장하고 치안이 확보되고, 장례를 위해 고려신학교측 인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1950년 10월 13일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 오종덕 목사의 사회로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 목사가 ‘순교에 대하여’라는 설교와 신학생들이 특송으로 장례식을 치루었다. 그의 순교 후에도 고신측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했지만, 옥중서한과 설교를 발굴하고 순교 신앙을 이념화한 것은 고려신학교로, ‘파수군’ 편집인이었던 안용준 목사가 담당했다. ‘파수군’에는 그의 설교와 옥중서신, 체형조서 등 열 여섯 편이 오롯이 남아 있다.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교회를 시무하던 기간에는 독자적인 목회가 이루어졌으나, 애양원과 교회가 설립자 미국남장로교회 선교부의 영향 아래 유지되었고, 선교부의 지원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되는 거주자들의 특성상 애양원교회가 선교부를 떠날 수 없었다. 손양원 목사 순교 후에 부인 정양순 여사는 손양원 목사의 신앙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성광교회를 설립하여 한상동 목사의 편지를 가지고 전국교회에서 모금하여 교회를 건축하였다. 이때 총회측 교회의 협력을 많이 받지 못했고 재정난으로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면서 3년 만에야 완공했다. 그의 순교 후 아내 정양순 여사와 유족들은 다시 일제강점기 투옥 때처럼 극심한 가난과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연이 지적한 바와 같이, 애양원교회나 ‘동도섬의 세 무덤’에 가면 유족이나 고신측 성도들은 당혹감을 느낀다. 그의 묘소가 생전에 그처럼 그를 박해했던 예장통합 측 역사위원회 역사 사적으로 지정 표식을 만나기 때문이다. 손양원 목사는 마지막까지 고려신학교 총무로서 ‘고신의 목사’로 목회하고,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면서 전도자로 빛나게 살다가 영광스럽게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한국교회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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