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8. 박형룡 박사의 고려신학교 교장 부임과 철수
- 작성자 : 나삼진
- 22-02-14 20:59
8. 박형룡 박사의 고려신학교 교장 부임과 철수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가 개교될 때 설립자들은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모시기로 했다. 해방 후 박형룡 박사는 1945년 11월 14일부터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있었던 평북노회가 주관하는 평북 6노회 교역자퇴수회 강사로서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안을 발표하였지만, 홍택기 목사의 강력한 거부에 봉착하였다. 그는 친일청산과 교회쇄신이 쉽지 않음을 절감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국내에는 신학적 갈등관계에 있던 김재준 교수가 이끄는 조선신학교뿐이라, 해방 후 1년 후까지도 봉천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1929년부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1931년 전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숭실대학을 거쳐 중국 금릉대학,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를 거쳐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해방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신학자였으므로 고려신학교로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잇고, 전국교회의 지지를 받는 신학교육을 위해 그가 꼭 필요했다. 고려신학교는 박형룡 박사를 국내로 모셔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는데, 1946년 7월 남영환 전도사를 보내었으나 콜레라가 창궐하여 인천에서 돌아오고 말았고, 한부선 선교사에게 몇 차례 요청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송상석 목사를 특사로 파송해 국내로 모셔오게 했다.
송상석 목사는 1947년 5월 20일 부산에서 고려신학교의 교장 위촉장을 가지고 상경했고, 서울에서는 김재준 교수의 신학에 반발해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던 신학생들의 서한도 가지고 6월 26일 만주로 떠났다. 그는 김포에서 영구행 홍삼 밀항선을 타고 중국으로 떠나 3일만에 영구항에 도착했고, 영구에서 봉천(심양)으로 들어갔다. 그는 박형룡 박사 가족을 모시고 대련항으로 왔고, 대련항에서 출항 허가를 받지 못해 6개월 이상 지체하였다. 일행은 9월 20일에 출항 허가를 받아 작은 어선을 이용, 사흘 후 인천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때 박형룡 박사가 입국하지 못했으면 국경이 막혀 영구히 돌아올 수 없었다.
그의 아들 박아론 박사는 당시를 “정말 믿어지지 않는 꿈과 같은 일”이며, 송상석 목사를 두고 “소돔성 멸망 직전에 찾아갔던 두 천사처럼, ‘구세주’처럼 보였다”고 했고, 송상석 목사도 그 여정을 “블레셋 군대와 충돌하면서 사선을 넘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우물을 길어오는 용사를 연상했다”고 했다.
박형룡 박사는 귀국 후 중견목회자들을 만나면서 서울에서 신학교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받아 마음이 흔들려 부산으로 가기를 망설였고, 한상동 목사가 서울로 올라가 만난 후에야 부산으로 내려와 10월 14일 부산중앙교회에서 교장 취임식과 박윤선, 한부선 교수 취임식을 가졌다. 이날 박형룡 박사가 ‘사도적 신학 소론’을 주제로 취임 강연을 하고, 고려신학교가 평양신학교를 잇는 정통신학교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그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에 편입하였고, 신학교 분위기가 활기차게 바뀌었다.
송상석 목사의 목숨을 건 헌신으로 박형룡 박사가 국내에 들어왔고, 한상동 목사는 자신의 사택을 박형룡 박사에게 내어주고 사찰 사택으로 옮길 정도로 극진히 모셨지만, 그의 귀국이 고려신학교에 도움이 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교계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자주 학교를 비웠고(한부선), 그들의 집요한 요청과 제34회 총회(1948. 4)에서 고려신학교에 추천서를 주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취임 6개월 만에 교장직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가고 말았다. 그는 재임중 단 하나의 글도 남기지 않았고, 박윤선 교수도 함께 데려가려 했지만 동의를 받지 못했다.
학자들은 박형룡 박사가 고신을 떠난 이유를 설립자 한상동 목사와 총회 승인 문제, 신학교 위치 문제, 선교부와의 협력 문제에 대한 이견 때문이라 길게 논하지만(허순길 39면, 양낙흥 70면), 그렇게 볼 일도, 그가 고려신학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도 아니다. 고려신학교 편입생 36명 중 하나였고, 장신대 학장을 지낸 박창환 박사는 회고록에서 “한국교회 보수적 유지들과 신앙동지회 동지들은 암암리에 새 일을 꾸미고 있었다. 박형룡 박사를 모시고 서울로 가서 다른 신학교를 세우려는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하였고, 그가 “전국교회 지도자들과 신앙동지회원들의 집요한 권유에 고려신학교를 떠나려는 결정”을 했으며, “고려신학교를 떠날 구실과 뚜렷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두 가지 명분으로 “종전처럼 미국남북장로교회도 후원교회로 받아들이자는 것”과 “전체 장로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회유하고 가르치고 회개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크리스찬 타임스’ 2017. 10. 28).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육의 이상의 차이로 떠난 것이 아니라, 서울로 올라갈 생각을 먼저 정하고 그후에 나누어질 명분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의 귀국에 고려신학교가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그가 서울에서 교계지도자들을 만나면서 부산에 내려가기를 꺼렸고, 제34회 총회의 ‘고려신학교 입학 지원자에게 추천서’ 논의과정에서, 신학적 무게가 있었으나 그는 발언하지 않았으며,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단절하려는 의지를 확인하고 교장직을 사임한 것이었다. 이것은 어려운 사정에도 많은 경비를 지출하며 목숨을 걸고 초빙한 고신에 대한 신의에 반한 행동이었다.
그가 고신을 떠난 후 한상동 목사는 충격으로 한 주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남영환은 그가 ‘보수신학의 분열에 결정적인 결과를 남겼다’고 했다. 교권주의자들은 이후부터 고신을 박형룡 박사까지 수용하지 못하는 폐쇄적인 집단으로 몰아갔다. 그가 사면한 후 박윤선 교수가 교장, 손양원 목사가 총무로 취임했으며, 고려신학교 신학은 ‘박윤선의 개혁주의 신학’으로 주형되었다.
박형룡 박사가 4대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는 신학교, 곧 ‘더 큰 일을 하려고’(박윤선) 서울로 떠났으나, 그러한 실험은 승동측과 연동측의 분열로 11년만에 끝나고 말았다. 1959년 WCC가입 문제 등으로 장로교 총회가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리되면서, 신학교도 총회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로 분리되었다. 그는 결국 어느 선교부의 지원과 협력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고,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을 위해 한상동 목사를 만났을 때 고려신학교를 떠난 것을 눈물로 후회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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