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총회 40년] 8. 재미총회의 역사적 배경
- 작성자 : EU기획홍보처
- 24-11-06 10:09
8. 재미총회의 역사적 배경
나삼진 교수(Evangelia University)
한국장로교회의 시작과 성장: 재미한인예수교장로회 총노회가 1985년 11월에 설립되었지만,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일제강점기의 수난, 그리고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과 역사적 맥을 같이 한다.
한국장로교회는 1984년 미국 북장로교회의 첫 선교사 알렌의 도래를 기준으로 13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로서, 이들의 선교로 한국장로교회는 첫 50년 동안 크게 성장하였다. 복음 전래 초기부터 국운이 쇠하였고, 기독교 전래 25년 만에 나라가 망하였는데, 한국 민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서구 열강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나라임을 인식하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 측면이 있다. 한국교회의 순적한 출발은 로마카톨릭교회 전래과정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온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선교사들은 복음 전도만 아니라 선교지부별로 팀을 이루어 학교를 설립해 교육하고, 병원을 설립해 환자를 치료하며, 다양한 선교 활동으로 사회 개조에 가까운 사역을 하였다. 한국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였고, 암울하던 일제강점기에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신사참배 강요와 조직적인 반대운동: 한국교회가 첫 50년을 맞아 희년 잔치(1934)를 마치기에 무섭게 신사참배 강요라는 혹독한 시련이 교회에 찾아왔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민적인 지원이 필요하여, 정신적인 통일을 기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공교육에서의 일본어 사용, 창씨개명은 물론 동방요배와 황민신민서사도 함께 강요되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여러 교파에서 신사참배를 찬성하였고, 마지막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이튿날 전국의 노회장이 대표로 참배하였고, 각 교파의 지도자들이 사절단을 꾸려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를 하였다. 교회마다 예배 전에 먼저 ‘가미가다’에 절하고 예배를 시작하였고, 총회적으로 시국강연, 교회종 공출, 국방헌금의 무기 공급 등이 이루어졌다. 한국교회가 가장 부끄러웠던 시절이었다.
일제의 강압적인 조처에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사에 참배하였지만, 깨어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신사참배가 단순한 국민의식이 아니라 제1, 2계명에 위반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반대하였다. 소수의 지도자들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이기선(평안북도), 한상동(경상남도) 목사와, 한부선(만주)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의 영향으로 신사참배를 시키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이들도 있었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가정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1940년 일제검거 때 체포, 투옥되어 5, 6년 동안 영어의 몸이 되어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혹독했고, 주기철, 최봉석 등은 옥중에서 순교했다.
신사참배 강요로 2천 명의 성도가 투옥되었고, 50여 명이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며, 마지막까지 감옥에 있었던 20여 명이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당시의 성도들은 이들을 존경하며 ‘출옥성도’라 불렀다.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던 한상동 목사는 6년 옥고끝에 해방을 맞아 주기철 목사의 후임으로 평양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회하던 중 1946년 4월 모친 별세 소식을 듣고, 마침 공산주의의 위협을 피해 월남하였다. 그는 부산의 대표교회였던 초량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회하였는데, 총회가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를 가결하면서 옥중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박윤선, 손양원 목사 등과 신학교 설립기성회를 구성하고 진해 신학강좌를 열었고, 이어 1946년 9월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한상동 목사의 교회쇄신운동은 고신교단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재미한인예수교장로회는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 과정에 설립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사진: 해방 후 주기철 목사 사택에서 기도회로 모인 출옥성도들(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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